적응,환경

외통인생 2008. 9. 2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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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2.021215 적응,환경

‘형님! 이렇게 복잡한 데에서 어떻게 사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형님은

‘나도 숨 막혀서 못살 것 같은데 네 형수는 그래도 서울이 좋다고 한다?!’

사람 사이를 능숙하게 비켜 가는 형님과 길을 뚫지 못해서 자주 쳐지는 나 사이에서 이런 촌스러운 말은 몇 번이고 끊겼다 이어진다. 형님과 나란히 걷다가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뒤 쳐진 거름을 재어 다시 따라 맞추면서 조금 전의 이해할 수 없는 형님 말씀에 꼬리를 달아서 되묻는다.

‘형수님은 이 탁한 공기와 시끄러운 소리를 어떻게 이겨낸답디까?!’

‘네 형수는 서울태생이라서 그런지, 전혀 시끄럽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도시의 한복판을 즐겨?!’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때는 퍽 오래전 일, 시골에서 우여곡절 끝에 형님을 찾고 나서 몇 번의 왕래가 있은 다음 내 서울 구경 나들잇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잊히지 않고 또렷이 되살아나는 이 번화한 길거리 대담이 있던 무렵의 내가 느꼈던 서울은 마치 돌개바람에 불길을 내는 아궁이에서 뿜는 연기에 숨길과 숨통이 막혀서 쩔쩔매다가 급기야 부엌을 뛰쳐나왔던 어린 시절에 아궁이 앞에서 겪은 괴로움과 같았다.

이 느낌은 언제나 적응력 약하고 순발력 뒤지는 순박한 사람을 빗대는 말 ‘강원도 감자바위’라서 산야에 머물러 앉을, 타고난 기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산과 바다와 바람이 만들어 낸 풍토에서 태어난 기질인데, 그래도 불을 지펴서 여물을 쑤어야 했던 고향에서 어린 시절의 밝은 자연환경 적응력이 항상 내 몸속에 남아있어서, 이것이 되살아 신체적 부적응으로 발진(發疹)되고 잠재하는 오염 거부 속성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숙명적으로 도시를 떠나서 살 수 없는 내 앞길을 생각하면서, 기질과 현실이 어긋나, 커다란 바위 짐으로 다가오니 더욱 생각이 깊었다.

짐짓 서울 사리를 생각할 때 더욱 걱정되었다.

기왕 몸 비비고 살 서울이면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는 서울내기로 어서 변해야 이런 고통도 없으련만 언제나 적응할지 걱정스럽다.

밤이면 기적소리만 들어도 심리 밖 정거장을 떠난 기차인지 들판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모퉁이를 돌아오는 기차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시계가 없어도 이 기차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 몇 시 기차인지를 알아차릴 맑은 공기와 오리 밖의 바다에서 나는 파도 소리와 긴 제방 넘어 흐르는 개울 물소리를 들으면서 맑은 날인지 흐렸는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를 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고요 속에 잠들고, 낮이면 소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소리를 들으면서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었던 우리 동네다. 어쩌다 짐자동차가 지나가면 큰 구경거리를 만난 것처럼 달려갔던 시골의 기억도 내내 날 사로잡고 있다.

지금 난 분명히 서울에 주민등록이 되고 잠잘 집이 있고 일터가 있는데 이렇게 숨쉬기가 힘들어서야 어떻게 하랴 싶다.

고향을 떠난 한동안의 외지 생활이라야 고작 커다란 유리문이 달린 점포가 단층으로 나란히 있는, 그런 시골의 읍이었고 어쩌다 대처에 가면 그날로 돌아오곤 했기에 특별히 귀 막고 입 막을 일도 없었거니와 그런 대처(大處)도 자동차가 드물게 다니는 도시들이라서 공기는 맑고 공해란 상상할 수 없던 옛날 도시였다.

내가 집을 떠나 세상의 단맛 쓴맛을 체험하면서 세월도 함께 갔고 산천도 함께 움직였지만, 요행으로 시골로만 다녔으니 그다지 내 원형질이 바뀌지 않을 만큼의 좋은 공기 속에서 살다가 꿈이란 것이 무더기로 싸여있는 대처로 이사하면서 조금씩 형질의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목젖에 자극받으면서 오염된 대기에 순화되고 거부의 대책 없이 귓바퀴만 매만지며 파열음을 흡수했다. 이렇게 적응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아직은 순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친걸음, 약속 없는 장래의 무지개를 따라서 나설 수밖에 없기에, 무릅쓰고 몸에 공해의 내성을 기르기로 했다. 고막에 두꺼운 각질을 입히기로 하고 발을 옮겨 놓고 있다.

처음 도시 생활할 때 무척 어려웠던 것이 오감이다. 가스 냄새에 숨은 막히고, 딱지가 앉을 지경의 소음으로 머리는 어지럽고, 시야에 전개되는 휘황한 상(像)에 망막이 찢어지듯 충혈되고,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은 심신의 피로를 쌓고 있었다. 정신조차 혼란해서 어떻게 될 것 같다.

나는 믿는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내성(耐性)의 축적이고 이 내성이 새로운 형질을 만듦으로써 온전히 자기의 생존 조건으로 삼아 마침내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영양소로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희생이 수없이 반복될 것이고 영속적 세대의 교체 과정에서 조금씩 변화하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아무리 답답하고 숨이 막혀도 자위(自衛)적 행동을 포기하며 섭리에 반하는 이 지경을 이어가는 나를 볼 수 없으니 역시 난 도시형이 아니다.

내 일생에서 반드시 가야 할 곳, 바다와 들과 강과 산이 아우르고 거기에 풀이 있어 이슬을 맺고 거기에 나무가 있어 바람을 쐬게 하고 거기 바위가 있어 이끼가 돋게 하고 거기에 물이 있어 숨을 고르고 거기에 물고기가 노닐어서 새를 부르고 그 물이 푸른 들을 적셔서 오곡이 자라 여물게 하는 그 두렁에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는, 내 고향 시골 마을에 돌아가기까지 참고 기다리는 길만이 이 서울을 극복하는 길이다.

꿈길의 고향! 생각으로나마 숨통을 틔우고 싶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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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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