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일을 제멋대로 했어도 그 결과에 대한 기억은 제멋대로 할 수 없다. 필요할 때 기억나지 않고 소용없어서 잊고자 할 때 잊을 수 없는 것은 신의 은총인 것인가 해서 신비롭다.
만약 사람이 제 마음대로 일을 저지르고 곧 후회하여 잊고 싶을 때 잊을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세상 살기 편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끔찍스럽게 편하기보다는 아예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 것인데, 그래도 그것이 나은지 곰곰이 따져보는 것도 흥미롭다. 저질러놓고 나서 난 모른다거나 내가 무슨 짓을 했느냐고 반문한다면 이처럼 황당한 일이 또 있겠는가 싶다.
머리를 쥐어짜는 번민(煩悶)과 뼈에 스미는 회한에 몸부림칠 때면 차라리 그 기억의 근원을 차단하는 편에 기울여 내 한 몸을 맡겨 긴 잠에 빠지고 한동안, 한세월이 지난 뒤에, 다 잊은 뒤에, 다시 깨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 비슷한 방법으로 매사를 잊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목욕탕이다. 아직 우리 집에는 목욕시설이 없고,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나 또한 그런 부류다. 해서 그 짜릿한 한증(汗蒸)의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일단 일상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하다. 때가 묻은 세상의 허물을 훌훌 벗어버리는 그 맛이 일상의 우리 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것이고, 흔히 얘기하듯 벗은 상태에서는 내남없이 같은 사람이라는 등식으로 바라보니 그 속에 담긴 알맹이가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피차가 편안하고 안락하다. 굳이 거기에서도 투시(透視)경으로라도 본다면, 필시 층층이 높고 낮은 사람과 주체 못 할 돈으로 싸 감은 사람이나, 땡전 한 잎 없어서 남의 덕으로 들어온 사람이나, 아예 도둑질한 돈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을 것인즉, 요행으로 아직 천리안이나 투시(透視)경을 낀 사람은 없으니 이 또한 다행한 일이다.
한데, 같은 형체의 사람들이 시설 안에 들어갔을 때 난 또 다른 감흥을 얻는데 그것은 같은 온도의 조건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기 때문에 나같이 특별한 재주가 없는 사람은 거기서 또 다른 위안을 얻는다. 너와 내가 같은 온도를 받기는 밖이나 사우나 시설 안이나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는 피부가 모두 함께 노출되었기에 밖에서처럼 다르게 체감(體感)하지 않는다. 재질이 다르고 입는 방법과 취향에 따른 다양한 선택으로 피부 보호의(保護衣)를 다르게 두르고 있으니, 겹으로 위축되거나 박탈(剝奪)감을 가졌던 일상적인 감정은 여기서는 느끼지 못하고, 다만 내 필요한 감정의 열도에 따라서 뜨거움을 느끼는 것인데, 이것이 퍽 재미있다.
여기서 그 사람의 심성이 드러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땀을 내어 때를 불린 다음 원수진 것처럼 비벼대는 사람, 드러누워서 비지땀을 흘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 두 귀를 잡고 앉았다 일어나는 짓을 반복하며 열심히 무릎 운동을 하는 사람, 제 발바닥을 주먹으로 힘껏 치는 사람, 그 자리에 비비고 엎드려서 팔굽혀펴기하는 사람, 더러는 그 좁은 곳에서도 골프 스윙 연습을 하는 사람, 이렇게 나처럼 세상을 잊으려고 현실도피 장소로 온 사람, 어떤 뜻을 품고 몸부림의 사교장(社交場)으로 온 사람, 이런 사람들의 각양(各樣)한 열기 이용을 음미하는 것이 내 여기 들어온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도 된다.
그러니까 나를 빼고, 난 이 세상에 없는 듯이 버리고, 객체로서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나를 잊는다. 남들이야 어떻든 나는 가장 높은 열도에서 가장 오래 견디면서 나를 시험이라도 하듯이, 인고를 체험이라도 하듯이 겪고 참아서 무아의 경지까지 이르렀을 때 비로써 나와서는 적당한 공간의 바닥에다 수건을 깔고 덮고서, 그 뒤로는 세월을 몽땅 털어 낸다.
모든 일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밝은 미래가 약속되는 것처럼 믿고 싶어지는 이 시간에는 몸도 마음도 딴 세상,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이국땅에서 걱정이나 안달을 해보아도 별수 없어서 마음 돌리듯이, 지구를 떠나서 어느 위성에서 지구를 보며 체념하듯이, 나를 있게 한 절대자로부터 보장받아 기쁨과 즐거움의 길에 들어서듯이, 평안하다.
일요일 하루는 온전히 내 시간, 나를 위해 있는 시간, 이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탕 밖에 나왔고, 자리에 돌아와 비로써 깨닫는, 난 솜털 같은 가벼운 마음.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나왔건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새까만 아스팔트 길에서는 역한 석유 냄새가 나고 자지러지듯이 울려대는 크고 작은 차의 높고 깨지는 경적에서 삶의 아우성을 듣고 있다.
때 빼고 광낸 내 얼굴에 세상의 온갖 먼지가 묻어 까맣게 될 내 얼굴이 태생으로 검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집에 와서 아내를 위문하는 애들 이모에게 긴 여행에서 돌아온 듯 내 인사를 해야겠기에 일요일마다 있는 애 이모들이 물음에 미리 대꾸할 말을 준비한다.
‘오늘은 때 빼고 광내는 날입니다. 어서들 오세요!’ 그들은 내 일요일의 다른 세상 얻기를 체험하지 못했으니까 그 얼굴에는 의아심이 역력하다.
세상살이는 내가 주무르고 내가 펴고 내가 늘어놓아서 그곳으로 갈 것인데 그 이상(理想)의 길을 이모들은 결코 알 수 없으니 응당 그럴 수밖에 없다. 우주를 유영하고 고금을 넘나드는 인간의 사고에 망각이란 있을 수 없다면 굳이 좋은 일만 있게 한 다스림이 필연인데 어찌 이리 들러붙어서 내 잘못을 고뇌하는지 모르겠다.
나를 잊고, 포근해지는 일요일, 자주 돌아오렴.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