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

외통궤적 2008. 9. 15.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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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나무가지가 보리알처럼 탱탱한 움을 틔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데도 담 넘어 앞집 지붕의 기왓장 틈에서는 지난 여름내 자랐던 풀잎이 초췌하게 말라 스러져서 아직 돋지 않은 새싹을 재촉하며 몸부림만 치고 있다.

햇살쪼인 쪽마루가 눈부시게 반짝일 때 바람을 타고 온 먼 곳의 아이들목소리가 처마 밑을 휘돌다가 사라지더니 담장아래 촉촉한 물기가 흙냄새를 뿜어 댄다.

대지는 벌써 기지개를 켜나보다.

지난 가을에 손이 닿지 않아 벗기지 못한 마루 쪽 틈새의 묵은 때가 고스란히 드러나며 내 마음이 들춰지기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눈을 먼 끝에 보낸다.

하고많은 생각을 밀치고 파란 하늘의 한 점 구름에 무심의 눈을 맞추고 함께 허공에 흘러간다.

두둥실, 떠가는 기백(氣魄)은 어느새 시간의 울을 넘으면서 차원(次元)의 계표(界標)를 뽑아 던지고 멀기만 하던 앞날을 함께 손아귀에 쥐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동시에 장악된 구름 한 점 나, 이제 영롱한 미래의 보석을 쥐고 땀 밴 보료 위에 올려놓아 알뜰히 닦을, 지금이다.

잠시 나를 잊고 있었다.

쪽마루에 걸터앉아서 양손으로 마루 끝을 짚어 부신 눈을 아래로 깔아서 툇마루의 한해를 본다.

들이치는 눈보라를 그대로 안아 녹여 무늬 진 나이테의 깊이를 더하면서 늦겨울을 이겨냈고, 따스한 남풍을 타고 온 제비의 집짓기를 올려보며 봄을 알았고, 장대비 쏟아질 때 툇돌 밑에서 튀겨 올라온 모래알에 맞으면서 견디어 여름이 다할 때쯤 하얗게 드러난 모래알을 내려 보았고, 고추잠자리가 바지랑대 끝에서 졸고 있을 때에 초가을을 익혔고,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참새 발자국으로 초겨울을 그렸던 이 쪽마루가 아니던가?

쪽마루에 앉았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는 작아질 수 없도록 작아서 터질 것 같은 이 집을 미련 없이 털고 떠나서 저마다 형편에 걸맞은 크기의 집에서 덩치 큰 중학생이나 고교생을 볼 터인데, 아무리 보아도 이 쪽마루에 그런 덩치의 우리 식구를 보기란 영 그른 이 집이지만 얼마 후에 고등학생을 이 쪽마루에 앉힐 것이란 생각에 가슴 설렜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까만 교복의 윗도리 깃이 유난히 하얗게 커 보이는 ‘나미’는 아직 솜털이 송송한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하고 있다. 

유달랐던 새까만 눈썹하며 그 아래에 푹 팬 눈언저리에 묻힌, 세상을 빨아 드릴 것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는 어릴 때처럼 여전히 사람의 혼을 붙잡고 있다.

이모와 이모부를 부모와 같이 믿고 천리 타향에 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스스럼없이 툇마루에 앉아있는 ‘나미’의 어른스런 모습이 대견하다. 흐른 세월을 재어볼 수 있다.

눈치 빠른 ‘나미’는 모든 이에게 귀여운 짓과 앙증맞은 아양을 함께 떨더니만 그만큼 이모들의 좋은 심성을 본받아서 재치 있고 총명하게 처신할 것처럼 단번에 느껴졌다.

예쁜 단화에 하얀 양말이 쪽마루에 과람(過濫)하게 투영되어서 쪽마루 틈새의 묵은 때가 싹 가신다.

갑자기 고대광실이 된 삼간 집이다.

그리고 꿈 많던 내 소년시절의 한 많은 역정이 일순에 밀려온다.

어느새 더 먼 옛날, 내가 살던 집 뒤란에서 소복하게 자라던 앵두나무가 되어 하늘거리며 다가오는 석류나무가지를 본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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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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