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 나뭇가지는 보리알처럼 탱탱한 움을 틔워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데도 담 넘어 앞집 지붕의 기왓장 틈에서는 지난 여름내 자랐던 풀잎이 초췌하게 말라 스러져 아직 돋지 않은 새싹을 재촉하고 있다. 햇살 받은 쪽마루는 눈부시게 반짝이고, 바람을 타고 온 먼 곳의 아이들 목소리가 처마 밑을 휘돌다가 사라지더니 담장 아래 촉촉한 물기가 흙냄새를 뿜어 댄다.
대지는 벌써 기지개를 켠다.
지난해 가을에 손이 닿지 않아 벗기지 못한 마루 쪽 틈새의 묵은 때가 고스란히 드러나며 내 마음이 들춰지기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눈을 먼 끝에 보낸다. 하고많은 생각을 밀치고 파란 하늘의 한 점 구름에 무심의 눈을 맞추고 함께 허공에 흘러간다. 두둥실, 떠가는 기백(氣魄)은 어느새 시간의 울을 넘으면서 차원(次元)의 계표(界標)를 뽑아 던지고 멀기만 하던 앞날을 함께 손아귀에 쥐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동시에 장악된 구름 한 점 나, 이제 영롱한 미래의 보석을 쥐고 땀 밴 보료 위에 올려놓아 알뜰히 닦을, 지금이다.
잠시 나를 잊고 있었다.
쪽마루에 걸터앉아서 양손으로 마루 끝을 짚어 부신 눈을 아래로 깔아서 툇마루의 한 해를 본다. 들이치는 눈보라를 그대로 안아 녹여 무늬 진 나이테의 깊이를 더하면서 늦겨울을 이겨냈고, 따스한 남풍을 타고 온 제비의 집짓기를 올려보며 봄을 알았고, 장대비 쏟아질 때 툇돌 밑에서 튀겨 올라온 모래알에 맞으면서 견디어 여름이 다할 때쯤 하얗게 드러난 모래알을 내려 보았고, 고추잠자리가 바지랑대 끝에서 졸고 있을 때 초가을을 익혔고,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참새 발자국으로 초겨울을 그렸던 이 쪽마루가 아니던가?
이 쪽마루에 앉았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는 작아질 수 없도록 작아진 이 집을 미련 없이 털고 떠나서 저마다 형편에 걸맞은 크기의 집에서 덩치 큰 중학생이나 고교생을 길러내고 있을까?
아무리 보아도 이 쪽마루에 그런 덩치의 우리 식구를 보기란 영 그른 이 집이지만 얼마 후에 고등학생을 이 쪽마루에 앉힐 것이란 생각에 가슴 설렜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까만 교복의 윗도리 깃이 유난히 하얗게 커 보이는 ‘미나’는 아직 솜털이 송송한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하고 있다. 유달랐던 새까만 눈썹 하며 그 아래에 푹 팬 눈언저리에 묻힌, 세상을 빨아 드릴 것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는 어릴 때처럼 여전히 사람의 혼을 붙잡고 있다.
이모와 이모부를 부모와 같이 믿고 천 리 타향에 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스스럼없이 툇마루에 앉아 있는 ‘미나’의 어른스러운 모습에서 흐른 세월을 재어볼 수 있다.
눈치 빠른 ‘미나’는 모든 이에게 귀여운 짓과 앙증맞은 아양을 함께 떨더니만 그만큼 이모들의 좋은 심성을 본받아서 재치 있고 총명하게 처신할 것처럼 단번에 느껴졌다. 예쁜 단화에 하얀 양말이 쪽마루에
과람(過濫)하게 투영되어서 쪽마루 틈새의 묵은 때가 싹 가신다. 갑자기 고대광실 된 세 칸집이다. 그리고 꿈 많던 내 소년 시절의 한 많은 역정이 일순에 밀려온다. 어느새 더 먼 옛날, 내가 살던 집 뒤란
에서 소복하게 자라던 앵두나무가 되어 하늘거리며 다가오는 석류 나뭇가지를 본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