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어림조차도 못 했던 내가 취수장과 정수장의 준공을 보게 되면서, 내 어릴 때 개울가에서 놀다가 둑 위에서 벌어지는 개미역사(役事)를 숨죽여 보았던 생각에 다다라, 닫혔든 과거의 문도 열렸다.
그때, 개미는 개미대로 그랬을 테지만, 나는 나대로 물길을 돌리고 온갖 것을 만들어서 기뻐했던 그 기쁨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서 내가 구조물 밑에 개미의 자태로 서 있다. 삼 년 남짓 인간 개미와 진배없는 역사를 벌여서 눈앞에 펼치니 감회가 남다르다. 더군다나 개미의 역사(役事)에서는 개미의 잘못으로 죽거나 다치는 놈을 보지 못했으나 그들은 훌륭한 집을 마련하고 공생의 기틀을 잡는데 견주어 우리는 실족(失足) 희생 위에 이룩되는 산물이고 원혼(冤魂)의 저주로 쌓인 탑이니 이것이 바로 인간이기에 초래되는 한계인 것이다.
미물만도 못한 것인지 자문하고 싶다.
곡절을 거듭하며 이렇게 버젓이 준공되기까지 참여자 모두는 혼신 힘을 쏟았다. 처음 공사장에 투입됐을 때만 해도 나 같은 공학 문외한도 별도의 쓸모가 있었으니 복잡다기(複雜多岐)한 공사임이 자명했지만, 오로지 모양을 갖추어 가는 나날의 성과에 매료되어 삼 년이란 세월을 강바람과 싸우고 군대 생활에 버금가는 막사(幕舍) 생활을 감수했다. 도면을 읽고 익히고 공정에 낱낱의 관심으로 그 윤곽은 어림했지만, 막상 준공을 앞두고는 이 공사에 별로 보탬이 없는 나조차 놀라운 결과에 뿌듯해지는 것은 아마도 작건 크건 내 힘이 보태어졌다는 자부심이 내면에서 솟았고 이를 떨칠 수가 없어서 일 것이다.
낙동강 물 밑바닥을 파내어서 취수탑을 설치하든 한겨울 공사나, 삼복의 한낮에 콘크리트를 비벼 넣는 공사나 모두 함께 부심(腐心), 각기(各其)의 기술을 발휘했던 혼연(渾然)의 작품이 아니던가? 엄청난 무게의 양수기를 소꿉 놀듯이 실내로 들이고 또 옥내 기중기를 이용해서 두레박 내리듯이 내려 설치하는 공정에 놀랐다.
쓸모없는 산기슭에 마련된 이런 거대한 구축물을 보며, 과연 이 세상에 있는 모두는 나름의 가치가 있구나 싶었고 그 시점이 언제이든 그 가치를 알고 확인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구나 하는 거창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론 이 믿어지지 않는 개발의 상징물은 산을 깎고 강을 파서 강산의 합일점에 인간의 역사(役事)가 더해져서 이룩된, 첨단의 기술을 쏟은 예술품이라고 자처할지라도 아름다운 여인의 젖무덤을 후벼 파고는 거기에 인공 사출(射出) 펌프를 달아놓고 수유(授乳)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인간의 이중적 가치척도에 비판의 비수를 대고 싶은 것 또한 한 쪽에서 이는 역심(逆心)이다.
이제 육조(六曹)의 재판을 도맡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거역할 수 없는 일, 이룩된 시설을 혀끝으로 난도질한다 해도, 조소와 질시의 방패를 뚫을 수 없는 부질없는 헛소리니 그만, 있는 그대로 뜯어보고 싶다.
취수(取水)장은 수직적, 역동적 힘이 필요하기에 심장과 같아서 언제나 쉼 없이 가동해야 하지만 정수(淨水)장은 수평적, 정체(停滯)와 침전(沈澱) 과정을 거치며 걸러야 하기에 간장(肝臟)과 같아서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고요히 흘려보낼 뿐이다. 동(動)과 정(靜), 수직과 수평, 흡입과 유출, 이렇게 상반된 기능과 구조 속에서도 유체(流體) 적 특성을 매개로 절묘하게 일치되어 있으니, 이것이 또 달리 돋아 뵈는 예술성이랄까?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생물의 정점에 선 나,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걸 숙명적으로 긍정하는 이제까지의 삶이 이 한 매듭에서 새로워짐을 알게 되며, 이어서 내가 살아가는 앞길에 험준한 산이 첩첩이 가로막더라도 넘고 넘지 않으면 이 공사장에서 얻은 극기와 인내의 체험이 물거품이 될 것이다.
내가 자란 곳, 내 고향의 민물과 바닷물이 교합(交合)되는 백사장에서 내가 떠났듯이 고통 속에 정들었든 산야와 낙동강 모래사장이 내 발꿈치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나는 떠나고 있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