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외통궤적 2008. 9. 22.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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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9.020127 간장

들통에 가득 찬 새까만 간장 위에서는 방울 진 거품이 누런 된장 색깔의 앙금을 끌어안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영롱한 비눗방울 같은 큰 거품은 들통을 돌다가도 금방 꺼지며 허옇게 변하는데, 흡사 가뭄에 말라붙었든 웅덩이 속 올챙이가 비온 뒤에 허옇게 배를 드러내고 떠다니는 것처럼 흉하게 보인다.


올챙이의 장송(葬送)이 불현듯 떠오르고 내 양 발이 그 자리에 붙었다. 나른히 힘이 빠지며 주저앉고 만다. 쪼그리고 앉아서 들통 속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거품이 이다.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다. 아닌 것, 좋은 의미의 거품이란 음식을 공기와 섞어 부풀리거나 특별히 색을 달리 내고자 할 때에 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헌데 건드리지 않는 음식에서 거품이 인다함은 좋게 여겨서 발효이고 언짢게 생각해서는 썩는 것이다.


섬들이 간장독에서 괴이쩍게 거품이 괸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오늘에서야 찾았다. 오자마자 부랴부랴 간장부터 들통에 떠서 무식쟁이 감식(鑑識)자 노릇을 하는 것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왠지 까닭 없이 울적하다.


한 달에 한번정도 들릴까말까 한 남의 집 같은 내 집에 들렀을 때 이웃에 사는 친구의 우려 섞인 말을 그냥 접을 수가 없었다.


‘장맛이 가면 집안에 우환이 깃들인다던데 한번 장독대에 올라가 보세나!’ 이 말을 듣는 순간 이미 와있는 우환에 대하여 간장은 뒤에나마 깨닫게 하는구나싶어서 잠시인들 못 본체할 수가 없기에 무릅쓰고 짬을 만들어 내려왔다.


운두(韻頭)가 가슴에 닿을 장독의 가장자리를 넘치듯 솟아오른 메주덩이와 그 언저리에서 분출을 예고하듯 괴어오르는 거품이 야릇한 냄새를 풍긴다. 예사롭지 않은 유동체(流動體) 메주를 냄새 맡으며 귀 기울여 소리 듣고 눈여겨보며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사의 가늠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상서롭지 않다는 친구 내외의 말에 기가 죽어서 홀로 이렇게 독백하고 하늘을 바라본다. 친구 내외는 차마 ‘장맛이 가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리라! 신기루가 일 것 같은 착시를 이기려고 기를 쓰고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이왕 서울까지 끌고 갈 바엔 제대로 된 간장을 독과 함께 가져간다면, 그로 인해서 병을 쫓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못하니 어찌하랴! 우환의 가늠이라고 하는 장(醬)맛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런 지경으로까지 왔다니 필시 곡절은 있을성싶다.


아침저녁으로 관찰하고 맛보면서 합당한 조치를 해야 할 텐데, 아니 그러기 전에 변질의 근원을 뿌리 채 뽑아서 완벽한 장(醬)을 만들어놓지 못한 터에 때를 맞추어 알맞게 손도 쓰지 않았으니 벌치고는 지극히 합당하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나를 버리고 가는 간장을 내 손으로 퍼내야 하는 이중의 벌을 내리고 있구나 싶어 긴 한숨이 터진다.


들통 위의 거품이 한숨의 코 김에 원을 그리며 나를 원망하듯 맴돈다. 누구의 손이 필요했건 우리 집에서 우리 집안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니 할 말은 없어지고, 오직 노여움을 나타내시는 현상(現象)에 조아려 사죄 할 뿐이다.


한 집안의 잘 되고 잘 못되는 정확한 가늠 법이 장맛이란 것을 옛사람들은 평범한 이치로 깨닫고 전수해가고 있음을 나는 아직 풋것의 오기로 조소하고 무심히 넘겨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헤매며 돌아 다녔지 않는가? 정확히 장에 대한 믿음은 없었다. 장독대위의 난간에 걸터앉아 내려다본다. 떨어뜨린 내 고개 아래에 눈부신 햇빛에 드리운 들통의 짧은 그림자조차 내게서 멀어지는 듯, 슬프고 외롭다.


장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께 담그고 뜨고 버무리셨으니까 내가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의 내겐 판단을 필요로 할 때 있어야할 분이 진정 없다. 장이 정상인지, 탈이 난 것인지, 손을 쓰면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인지, 돌이킬 수 없도록 산패(酸敗)한 것인지, 부패(腐敗)한 것인지, 판가름이 필요한 이 시점에 섰건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끝내 퍼내 버려야하는 이 마당에 와서, 선인들의 장에 대한 믿음과 확신과 떠받듦이 마땅한 것임을 절실히 깨달으면서도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관심 밖의 아내에게 이따위 무거운 짐은 차라리 바보의 짓인지도 모른다. 장과 독은 따로 뗄 수 없는 것임에도 이나마 빈껍데기라도 가져가야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나의 뜬 마음엔 이따위 간장 된장 같은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


먼 동네에서 장 뜨는 아낙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넘쳐 들리는 이 시각, 눈앞에 가득한 소금 끼 어린 독을 바라보면서 거품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염분을 몇 할 함유해야 염장으로써 알맞은지 기온은 어떻게 조절하여 염장의 독을 관리하는지 또 덮개와 숯 덩어리의 쓰임새는 무엇인지, 그 귀신 불러 푸닥거리라도 할 마음가짐으로 지성으로 섬겨야 하는데도 우리 내외는 그것을 외면했다. 당연한 결과인 것을 뉘라서 구제할까!


어느 집이든지 정성을 다해서 염장을 담그면 그만한 보람을 갖는 것이 온당한 이치임을 생각하노라니 눈빛은 흐려지고,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빈 마루는 아직 내 시력이 마루문 유리를 뚫지 못해 깜깜하다.


열기에 굴절된 시선은 방울방울 간장 거품의 표면 위에서 미끄러져 구를 뿐이다. 빈 독만을 가져왔는지, 간장만을 떠왔는지, 간장과 독을 함께 가져왔는지, 상관하지 않을 아내의 창백한 얼굴이 방울방울 떠도는 거품 위에 작게 점 박았다가 톡 꺼지면서 사라진다.


다시 긴 한숨을 내 쉬고는 한번 하늘을 보고, 한번 어두운 마루 안을 보고, 먼 서울하늘을 보고, 부산의 하늘을 보고, 들통의 손잡이를 움켜지고 힘껏 허리를 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아래로 쏟아 부었다. 영롱한 빛도 올챙이 같은 희멀건 거품도 유월의 훈풍에 실린 고린내와 함께 천지에 퍼져나갔다. 한나절 실랑이 끝에 독을 휑하게 비었다.


정성을 담지 않았으니 그 표징을 오늘에는 흩고, 가다듬은 정과 곱살스런 손길이 닿거든 훗날 다시 모이자! 그 날에 우리 식구도 함께 모여 웃자!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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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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