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행

외통궤적 2008. 9. 2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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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수놓아 노닐던 별들이 무대의 서쪽으로 사라지는 여명에, 주역의 이지러진 달은 하얗게 바래어 바람에 날리듯 구름을 스친다. 텅 빈 하늘 무대엔 회색의 공간만이 내 눈을 찢어낼 뿐, 아직 태양은 뜨질 않았다. 동녘의 먼 팔공산 정수리는 그 모양을 드러내고 시꺼먼 앞산은 그 치마폭 휘장을 열어가며 태양의 독무대를 천천히 준비한다.

 

눈까풀을 비벼 한껏 벌려 봐도 내 갈 길, 이삿짐 길은 하늘 위엔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들끓지만 하늘무대는 적막을 호소하는데 이대로 우리 식구를 하늘의 빈 무대로 옮겨서, 별들의 뒤를 따라 숨었다가 내일의 무대를 기약하고픈 한 순간의 욕망, 이 가없는 하늘무대에서 어느 진공의 공간에 있다가 알뜰히 되살아나고 싶다.

 

누구하고도 경합하지 않는, 경합될 수 없는, 깜깜한 내 길에서 그래도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놓치지 않음은 내 생존 실체의 확인에서 그나마 꺼뜨리지 않고 되살아나게 한다.마침내 환하게 비치며 한낮에 이를 것이고, 죽지 않는 한 반드시 광명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충천(沖天)한 태양은 오늘 내 갈 길에 한 치의 오차 없는 참된 길을 열 것이다.

 

과연 무대의 주인 태양은 붉게 타올랐다. 나는 이삿짐 트럭에 몸을 싣고 ‘팔달교’를 타고 넘으며 숨 막히는 대구의 하늘무대를 바라보았다. 공감하는 객하나 없는 외로운 객장에 홀로 누워서 꿈에 어린 나만의 하늘무대를 지키던 집, 정(情)가는 내 집인데, 그만 뿌연 아침 안개 속에 깔아 묻고 말았다.

 

추풍령을 넘으면서부터 떠나온 대구분지의 하늘무대가 내 등 뒤를 자꾸 따라오고, 그 넓은 무대를 누비는 밤하늘의 별들의 쇼에서 내 공허한 행로의 지침이 될법한 어느 하나를 뚫어지게 보아 추적하지 못하고 놓친 허전했던 새벽, 그대로 여명을 맞이한 간밤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그러면서 기로(岐路)에 섰던 한 때를 생각한다. 많은 일터를 배회하면서도 아직 평생 헌신할 보람찬 일터를 찾지 못한 나에게 전기(轉機)가 될 구수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 눈앞에 아른거리며 잡힐 듯 한 그 가닥을 내 딴에는 냉철히 분석하느라 선뜻 움켜잡지 않고 고심했던 일이 되살아난다.

 

집을 팔았을 때, 아직은 새로운 직장을 마련하지 못했을 때, 부산에 있는 인척 한분을 통해서 들려온 말인즉 트럭을 사서 서울 부산을 오가며 짐을 실어 나르는 운송업을 하라고 추겼는데,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귓전으로 넘길 수만은 없는 형편이었기에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 내가 운전면허라도 있었던들, 어쩌면 집 팔아서 받은 돈을 밀어 넣고 그 길로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요행히 내겐 면허가 없었다. 지금도 면허는 없다.

 

아마 없는 면허는 나의 내면을 포장한 변명과 구실의 허울이었을 것이다. 마음에 있었다면 굳이 그 길로 들어서서 면허를 받고 사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일관된 내 생각은 아직도 변함없는, 내 유년시절의 아버지의 유언 같은 말씀이 나를 짓눌렀기 때문에 다른 가닥의 길을 택했고, 나는 지금 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혼자 팔고 거두고 싸고 싣고 감독하고, 화주로써 트럭에 탄, 나 혼자의 결행 길이다.

 

권하는데 못 이겨서 지금 이 짐차의 주인기사와 비슷한 벌이 길로 나설 뻔했던 지난 일이 내 입지(立地)와 교차되면서, 마치 내가 내 트럭을 몰고 남의 짐을 싣고 달리는 착각마저 일으키는 한 순간이다.

 

가슴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될 뻔했던 그 때, 나는 다원(多元)적 무한변화의 시발점에 떠서 옆으로 갈까, 위로 솟을까, 아니면 비스듬히 삐어질까, 그도 아니면 밑으로 잠길까, 가늠할 도량형(度量衡)을 찾지 못하고 내 자(尺), 내 저울, 내 그릇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냥 이렇게 끌리는 곳, 서울을 향해서 내닫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혼을 다하는 정신적 노동을 추구하는 내 막연(漠然)의 길인 것이다.

 

길 위엔 많은 이삿짐 트럭이 오간다. 더러는 우리를 앞세우고 더러는 뒤지고 또 더러는 거꾸로 내려가고 있다. 그 트럭 위엔 빠짐없이 이삿짐 주인의 애환을 담은 농짝이 실려 있고 그 위에 삶에 찌든 담요를 덮어 펄럭이며 오늘의 삶을 구가(謳歌)한다.

 

사연은 모르겠으나 모두는 절박한 내 이삿짐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운전석 옆에 앉은 화주들은 저마다 간밤에 초롱초롱한 하늘의 별을 따 앞세우고 창공에서 끌어내린 둥근 달을 안고 탔는지, 희색이 만면하다. 그들은 결코 혼자서 하늘무대를 관조하진 않았을 것이다. 희망찬 노래와 웃음의 화답으로 손뼉치고 볼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환호했을 것이다. 그들은 비록 지금은 돈과 뒷줄과 권부(權府)의 강렬한 태양아래 빛을 잃고 있지만 지는 해와 더불어 찬란히 빛날, 그 무변(無邊)의 하늘무대에서 별들과 더불어 노닐 그 시간을 고대하며 가고 있을 것이다. 내, 옮겨질 서울의 밤하늘 무대에서는 결코 홀로 관조하며 독백하지 않으리라!

 

 

쇠 장롱캐비닛은 시멘트불럭 벽에 기름종이 지붕을 얹은 삼간 집의 문으로 집어넣기에 걸맞지 않게 조금은 어색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끝은 맺어야 할 일, 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언덕길에 멈추어서 저나르는 차주의 노고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다. 또 한 번 뒤바뀐 나를 보는 것 같다.

 

아무리 초대면이자 마지막이 될 기사와 조수일지라도 이 마당의 어색함을 면하기 위해서도 별도의 사례를 외면 할 수가 없다. 내 식구가 있다. 내 장롱과 살림이 있다. 내 오두막이 있다. 더불어 내 일터가 있다.

 

이만하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과 숨을 듯 수줍은 달이 함께 하는 하늘무대를 나와, 아내와 별 아기 남매와 더불어 오두막 쪽 문을 열어 제치고 관조(觀照)하며 이승의 깊은 맛을 맛보고 이슬을 머금은 밤하늘의 청아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욕심을 부려, 내일 작열하는 태양아래 충천(天)의 기개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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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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