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

외통궤적 2008. 9. 2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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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몇 살, 정확히는 몇 달째부터 걸었는지 기억할 수 있다면, 그때의 걸음마의 단계적 체험이 생각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더듬어 보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게 오히려 당연한데도 안타까이 더듬어 헤맨다.

이렇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내 남다른 고민을 해결할 수가 없는 절박한 사정이 있기 때문인데, 내 걸음마를 기억할 수만 있다면 바위를 깨고 나온 아기 장수가 겨드랑에 작은 날개를 달고 버텨 서서 제세안민의 뜻을 쏟아 내는, 어릴 때 들은 옛이야기 속의 그 장수에 버금갈 것이거늘 내 어찌 거기에 미칠까만, 하도 답답하여 이런 생각까지 해보는 까닭이 너무나 서글프다.

심장을 터트리고 거기서 흐른 선홍빛 피를 손바닥에 담아 하늘에 올려서라도 기억하고 싶다. 그리하여 아들을 돕고 싶다.

아내는 아들의 손을 붙잡아 부축하고 난 아들이 신은 보조화의 왼쪽을 들어 옮기며 걸음마 연습을 시키는 일을 벌써 몇 달씩이나 반복하고 있다. 내년 봄에는 일 학년에 입학시켜야 하는데, 남들과 같이 유치원에도 보내지 못하고 걸음걸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학교에 보낼 것을 생각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되풀이 연습을 시키는 고통도 우리 부부의 한에는 차지 않고, 차도(差度)가 뚜렷하지 않으니, 눈물로 지새는 나날인들 또 어디다 하소연하랴!

그냥 함께 조급하기만 하다. 이미 가버린 애의 복락기구(福樂祈求)는 뒷전으로 밀리고, 눈앞에 보이는 아들의 답답한 행보(行步)에 마음조일 뿐이다.

울안의 샘가에서 나물 씻은 물이 인공 꽃동산의 실오라기 개천을 따라 흐르고, 그 물 위에 떠내려가는 고무신을 잽싸게 뛰어가서 건져내는 민첩성, 외짝 코고무신을 놓치고 발만 구르는 세 살 동갑내기 여자애 친구에 덥석 쥐여주는 그 의젓하든 짓, 그런 것은 다 어디다 바치고 몸조차 주체 못 하는 불수의(不隨意)의 몸이 되어서 비지땀을 흘리는지!

그때와 판이한 모습으로 애쓰는 아들, 그러면서도 천사같이 해 맑은 웃음을 선사하는 아들, 바위에서 갓 나온 장수같이 엄마 아빠에게 호령(號令)을 치고 있는 아들 녀석의 앞날을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빌면서, 발목에 붙어서 움직이는 하얀 쇠막대 지주의 구동(驅動)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축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이 쇠붙이가 아들의 복숭아뼈 구실을 하고는 있는지? 신경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과연 살아나게 할 것인지? 못 믿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두 손으로 발을 들어서 옮겨놓으면 그 소리 ‘철버덩’, 좁은 방을 울린다. 식구의 울음이 터질 때까지 반복하는 이 연습에 우리 내외는 내일이 무섭기만 하다.

상처받을 어린 마음, 구름 위에 오를 추임새로 뛰어야 할 다리,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서로 얽혀 구르며 신나게 놀아야 할 때 발이 말을 듣지 않고, 다리가 무거워서 포기해야 하는 어린 그 마음을 생각하면 참담하고 안달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이런 때에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서라도 도움을 주어야 할 텐데, 도무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아들의 걸음걸이에 도움을 줄지, 안타까이 내 어린 시절의 걸음마를 상기(相忌) 하나, 그믐밤처럼 깜깜하다.

이런 때 발을 무릎까지 올라오도록 올려라 하든지, 하다 못해서 팔을 어깨높이로 올려야 한다든지, 하는 되지도 않는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왜 발이 올라가지 않느냐고 물어본들 소용이 없으니, 신에 달린 애꿎은 쇠막대와 용수철에 내 눈총을 쏘며 하소연한다. 용수철아! 쇠막대야! 네가 아들의 발이니 부지런히 움직여서 아들의 발목에 힘을 넣고 아들의 다리에 신경을 살려서 너와 함께 부담 없이 거닐도록 해다오!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설혹 의학적 설명이 가능해도 아들이 그 징후와 같다고 생각을 할 수 없을 것 아닌가? 이래저래 속이 숯덩이가 된다.

‘애들을 위해서 서울에 왔노라’라는 외침은 허공에 메아리 없이 사라진 헛소리였고 허세가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하니 나락(奈落)으로 떨어지는 절망이다. 분명한 까닭을 찾으려다 놓치고, 울분에 넘친 피의 역류로 심장이 멎는 아픔에 혼미해진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모든 수단을 다하자!

그래서 과외 공부를 생각하게 되었다.

처지를 따질 일이나 체면을 가릴 것은 털끝만치도 있어선 안 되는 절박한 우리, 더더욱 망설임을 밀쳐야 하겠기에 마음 다진다. 지금 우리에게는 과외 공부 말고는 아무런 뜻을 찾을 수 없다고 스스럼없이 여겨서, 경력 있는 독(獨)선생을 드려 배움의 길을 열었지만 만만치 않게 힘이 든다. 선생이나 아들이나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불투명한 앞이지만 밝게 생각하자! 신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계신 데 아둔한 우리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할 뿐인 것을 새겨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다 함께 죽음의 문턱에서, 아니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다. 되돌아온 사람들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맑은 하늘과 푸른 산천을 보게 하고 땅을 밟고 흙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되돌렸으니, 그것으로도 감사해야 할 따름인 것을 모르고 번뇌하니 아마도 생사의 고비와 함께 고통의 고비도 넘어서서야 깨닫게 하려는가 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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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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