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는 버스마다 먹을 것을 잘못 먹어 배탈이 났는지, 잘못된 집 딱지를 둘러써서 옆구리가 터졌는지, 온통 검은 연기만 뿜어대어 길가의 절개(切開)지 바위를 까맣게 칠하고서도 모자라 오늘도 다투어 토해낸다. 깎인 바위가 무너져 내리도록 내 지르는 버스의 파열(破裂)음이 고막을 째는데도 집밖에 학교를 두고 큰길 고개 너머에 통학시키는 우리네 배포를 따질 겨를 없이 이미 이루어져서, 번쩍거리는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아들의 뒤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까지도 헤아려야 하는 것, 진행은 언제나 내 사고를 선행한다.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지만 내 남, 모두 한 가지 걱정씩은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억지로 눌러 참아본다.
오늘도 당당히 학교로 향하는 아들의 뒤를 지켜보며 머리를 흔들었을 아내의 마음을 모른 상태에서 해야 하는 숨은 심정을 내 마음속에 꼭꼭 담아 놓는다.
빨간 벽돌집을 벗어난 아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숙명으로 여긴 듯, 말없이 걷고 있을 것이다. 내심 무허가 집들 사이를 누비는 얼마 전까지의 서글픔보다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코앞의 학교를 스치는 아들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외면하는 마음, 제대로 키운답시고 내 능력을 덮어두고 강행하는 아비의 마음, 이다음에, 입에 담을 수 있는 떳떳한 아비의 위치가 선행됐어야 할 나, 또다시 가스 사고의 전철을 밟지 않는지 모르겠다.
들은 바에 의한 어떤 학부모처럼 자식을 위해서 아예 학교를 만드는 위세라야 ‘자식을 위해서 왔노라’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럼 난 세월만 넘기는 무능력한 아비로서 공연히 자기 도피 변명으로 아들을 파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비탄에 빠진다. 어째서 애들을 위한답시고 하는 일이 해놓고 보면 아이들의 위치에선 엉뚱하게 멀어진 결과가 되곤 하는지 모르겠다. 기괴한 우리의 행각이랄까 처신이랄까, 하는 것이 마냥 어긋나는 지향(志向)과 행적(行蹟)을 나로선 설명키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어긋난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 고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새집을 사서 이사해도 답답하다.
그러다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하고 있노라고 변명하면서 어깨를 내려 본다. 머리를 들어서 하늘을 본다고 당장 뾰족 한 수가 나오는 것이 아닌데 마냥 자탄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아서, 다시 몇 년 후에 그날을 기약해 보기로 마음먹고 일손을 잡는다.
환경은 그래도 조금 바뀌었다고나 할까? 회색 일색의 시멘트와 검은 기름종이나 축사용 간이 지붕으로 된 동네를 떠나와 제대로 설계하여 허가받아 지은, 정화조가 있는 집들만 모인 동네인데도 별로 아들에겐 도움이 되지 않는 동네로 이사 온 것은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내외의 허영 때문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할 일이다.
큰길에 나가 버스를 기다릴 때 더욱 아들의 안위가 걱정된다. 층계를 오르내리는 육교가 있어 다행이긴 해도 그 육교를 오르고 내리는 동안 무슨 사단이 있을 것 같은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시꺼먼 매연을 마시며 고개를 넘었을 아들, 그때마다 마시는 매연이 오래전에 들이킨 연탄가스로 훼손된 장기에 반응 내지 침투되어서 또 다른 화는 없을 것인지, 평온하던 내 마음이 또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상념은 죽도록 내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옳다. 그래야만 내가 살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란 자각을 하면서 다시 머리를 흔들고 내 정신을 찾아 일상으로 돌아온다.
고맙다! 아들아! 잘 자라다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