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

외통인생 2008. 10. 15.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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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滿醉)

5527.030821 만취(滿醉)

자손들이 찾기 쉽게, 잊지 않게 하신다고 커다란 바위 옆에다 자리 잡은 묏자리는 산 중턱을 깎아서 닦아놓은 계단식 묘터의 아래쪽 가장자리에 있다. 바로 옆 왼쪽엔 급히 흐르는 물길이 있고 아래로는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의 묏자리는 처숙과 내가 정하여 샀는데, 장모님의 살아계실 때 늘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서 마련했다고는 하나 처 외숙들의 불만은 눈에 띄게 나타났다.

풍수의 이치에 어긋났다며 혀끝을 차는 이도 있었다. 그분들은 서울의 사정을 모르고 있을뿐더러 당신들께서 이 묏자리를 고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할 말씀들을 다하시고 계신다. 과연 그 자리가 그렇게 좋지 않은 곳인가. 많은 이가 옆으로 나란히 이미 잠들어서 이승의 허울을 작은 봉우리로만 겨우 남겨 놓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왜 여기에 잠들어있는가.

다른 곳이 개발조성 되지 않은 이 묘원(墓園)에서 그들도 최후의 한 자리를 겨우 얻은 분들일 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었으니 그 때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는데도 그런 것을 설명하기엔 그 날이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아픈 날이었으니 입을 다물고만 있을 뿐이다.

서글픔은 내 안으로만 자꾸 잦아들고 있다. 묏자리마저 입에 올릴 수 있을 만큼 망자의 혼을 걱정하는 이 때엔 어느 누구도 망(亡)자를 떠난 생각을 할 수 없는데도 어째서 나만 이렇게 겹으로 생각나며 슬픈 것일까.

과연 우리 아버지는 당신이 사랑하던 포근한 흙 이불이나마 덮으셨을까. 과연 어머니는 사시사철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꽃동산에 모셔졌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상념에 싸여서 오그라들고만 있다.

장모님은 우리부모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달래주는 대신(代身)이었고 더러는 우리부모님께 대한 나의 염려의 매파(媒婆)가 되었고 때로는 내 고독한 삶의 은신처인 어머니의 치마폭이 되시기도 했다. 오늘 이런 분을 보냄은 내 꿈을 묻어버리는 날이기도 하여 몹시 괴로웠다. 묘 자리의 좋고 나쁨은 내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우글거리는 사람들이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모두가 연고 없는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하관예식이 끝나고 음복이 있을 때 나는 내 정신을 이미 잃고 있었다.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강한 충동에 기회를 만들어서 되도록 많은 잔을 받아 마셨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몸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아직까지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던 처 형제들과 동서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은 몽롱해지고 사지는 풀렸다. 누군가가 돈 봉지를 달래서 가져갔다. 적절한 조치였다. 부축을 받아가면서 겨우 차에 오르기는 했지만, 가물가물 이어졌다 끊어졌다하는 내 흐트러진 정신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가물거리는 피안(彼岸)의 세계에 내 마음을 흘려보냈다. 어머니의 자태가 점점 가까워져서 마침내 나를 감쌌고 나는 얼굴을 털썩 묻어버렸다. 눈물이 고여 넘쳤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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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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