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목

외통궤적 2008. 10. 30.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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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0.040103 건널목

삼거리 가각(街角)에서 빌딩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나갔다.

눈앞에 건널목이 보였고 그 너머에 서소문 네거리의 교통신호등에 빨간 불이 보였다.

건널목을 건넌 차들이 차선을 가득 메워 주차장처럼 빼곡하게 채워지더니,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그 꼬리가 건널목 찻길 이쪽, 내 앞까지 이어졌지만 그중 가운데 차선 한 개만은 용케도 비어있었다.

건널목 앞의 ‘일단정지’는 내 몸에 밴 짓이라서 서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곧 건널목 저편 네거리 신호가 파랗게 바뀌었다. 건널목 건너의 차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빠져나갔고 난 내 차례가 되어서 따라 움직인다.

아직 옆의 차들은 움직이질 않는다. 아마도 건널목 너머의 차들이 아직 줄지어 서 있어서 단숨에 넘어가려고 기다리나 보다.

나는 내 앞에는 차단시설이 없었기에 서슴없이 움직였다.

순간 선로가 눈앞에 선명히 드러나더니,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 나온 간수는 빨간 기를 흔들면서 양팔을 벌린다.

그 자리에 섰다. 나는 신호를 보면서 움직였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어리둥절했지만, 어쨌든 섰다.

간수는 내 앞의 철길 너머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주시하는데, 보아하니 열차가 오는 것 같았다.

냉방을 하느라 창문을 닫았던 터라 문을 열어 영문을 알아보니, 그제야 땡땡 종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차단기는 보이지 않고 길 앞은 훤히 뚫려있다.

내 차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 아찔하게 소스라쳤다.

내차 앞길은 열려있지만, 양옆 차의 앞에는 짧은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고, 더욱이 오른쪽으로 보이는 철길은 옆 차에서 조금 떨어져서 멀리 비스듬히 나란한 데 반해 왼쪽으로는 옆 차에 가려 철길은 보이지 않는다.

내 차는 철로가 눈 아래 보일 만큼 위험하게 다가가 있지만, 차는 분명 서 있다. 그런데 앞으로 움직일 것 같아 두렵다.

이 자리가 안전한 자리인지, 아니면 불행을 가져올 자리인지, 순간의 판단이 요구되고 그에 따라 자동차의 변속기를 후진으로 작동해서 내 마음이 평안하도록 조치해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 내 몸을 얼어붙고 말았다.

자, 앞으로 나가자니 간수가 가로막고 있고 뒤로 후진하자니 기어를 잘못 넣어서 꼭 앞으로만 움직일 것 같다. 만분의 하나 잘못일지라도 그 가능성을 없애려면 그냥 이 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있어야 하는데, 열차하고 부닥칠지 아니면 요행으로 넘어갈지 알 수 없는, 묘한 철길 앞에 서 있다.

불균형의 원인은 철길과 찻길이 마치 벌어진 가위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간수는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그도 이 순간에 어떻게 조치할 수가 없다.

꼭 후진해야만 할 텐데, 그러다가 어찌 잘못되어 전진 한다면?

그래도 이 상태에서는 받혀도 열차 밑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지는 않겠다고 판단하고서야 마음을 다잡고 눈을 감았다.

‘천지신명이시여! 저에게 말미를 주십시오.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커가는 애들, 병마에 시달리는 아내, 회한에 사무친 부모와의 이별에 대한 속죄, 흐트러진 회사일 수습, 뒷자리에 탄 직원의 안위, 이런 것들을 마무리 짓게 저를 살려 주십시오!’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다.

힐끔 뒤돌아보니, 내내 수상쩍은 내 행동을 지켜본 뒷자리의 수하 여직원은 아직 아무 말 없이 엎드려 있다. 무슨 말이라도 할 성싶은데도 아무 소리 없이 잠잠하다. 그도 혼이 나갔는지,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것 아닌가?

나는 행운을 빌고 있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바라본다.

“‘열차님’! 제발 왼쪽에서 오십시오!”

왼쪽에서 오는 열차는 복선 선로의 맞은편이니 그리로 지나가야 내 차가 안전할 것이기에, 빌고 또 빌지만, 잠깐 사이의 내 바람일 뿐 그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눈을 왼쪽으로 고정하고 뚫어지도록 쳐다보지만, 기적소리는 오히려 오른쪽에서 들렸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눈앞엔 집채같이 큰 기관차가 시꺼먼 머리를 내 코 앞에 들이대며 밀고 온다.

하늘에 빌었다. ‘제발 내 자동차와는 부닥치지 마옵소서!’

기관사가 윗몸을 문밖으로 내밀고 아래를 내려 보다가 내 차를 스치는 때에 몸을 바로 한다.

바로 그 순간 내 차의 왼쪽 앞 범퍼가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다음 순간을 눈을 감고 기다렸다. 육중한 차량은 레일과의 마찰음만 요란할 뿐 내 엉덩이는 들썩이지 않았다.

기관차 뒷부분 오르내림 사다리 끝이 내 자동차에 닿았다.

기나긴 열차 꼬리가 십 리나 되어 보이더니 눈앞이 환해졌다.

나는 살았다.

잠시 긴 한숨을 쉬고 차 밖으로 나왔을 때 간수는 ‘제자리 근무 칸(box)’로 몸을 되돌리고 있었다.

간수는 열차가 지나가는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에 이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손에 든 파란 기를 말아 쥐며 몸을 돌려 초소로 향해, 사라진 기차에 빨려가듯 몸을 날려 몇 발을 가다가 멈췄는데, 어느새 그의 앞에는 까만 제복의 기관사가 다가와 있었다.

죽음에서 살아난 내가 겨우 차에서 내려 왼쪽 범퍼를 보고 있을 때 내게 달려온 그들은 운전면허증과 주민등록증을 요구한다.

기차는 이미 지나갔는데 무슨 문제가 되는지를 따지려는 내 의도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간수와 기관사는 완강하게 요구하면서 말한다. 기차가 저기에 서 있고, 기관사는 기차가 무단 정차에 대한 경위를 보고 해야 하고, 사고 없이 정차한 데 대해서는 직무 유기로 되고, 무단이탈로 되고, 강력한 처벌을 면할 수 없다면서 ‘불가분의 조치’라는 것이다.

어쩌면 열차를 멎게 한 중대한 범법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중 삼중의 고난이 닥칠 판 이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다. 수습의 길이든 수형(受刑)의 길이든 남아있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모든 걸 흐름에 맡기기로 하고 면허증과 검사증 주민등록증을 내어주고는, 내 차 왼쪽 이마가 터진 채 바퀴를 굴렸다.

차는 잘 굴러간다.

뒤에 앉았던 직원은 그사이 무엇을 생각했을까? 물어볼 염치가 없다. 몹시 부끄럽고 민망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얼떨결에 ‘놀라셨지요?’라고 물어보면서도 내 어쩔 수 없었든 상황을 설명하려면 긴 시간과 그와 나와 같은 정서를 만들어야만 가능하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쳐서는 가슴이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곡절을 겪으면서 수습은 되었지만, 난 필생의 교훈을 얻었고, 나를 구해준 보이지 않는 힘을 만났다.

상황은 절묘하게 접합되어 있었다. 열 가지 스무 가지가 일시에 바늘구멍 같은 시공(時空)의 한 점으로 동시에 집합되어 일어났다.

내 생각의 산만, 뒤에 탄 여직원의 기어드는 목소리에 대한 나의 경청, 에어컨 가동으로 외부 소리가 차단되었음에도 창을 열지 않고 그냥 정지만 한 행동, 미리 나와 있지 않고 ‘바람막이 칸(box) 속에 계속 앉아있는 불성실한 간수의 근무태도, 열린 청신호, 차단기가 보이지 않은 채 차들만 보인 절묘한 사각(死角), 내려진 짧은 차단기가 가운데 차선인 내 앞까지 가로막지 못한 짧은 차단기, 그래서 보지 못한 정지선, 그 시간이 하필이면 내 차와 가까이한 선로인 ‘수색’으로 가는 열차 시간이었는지의 우연, 후진할 수 있는 자신감의 결여로 만에 하나라도 잘못한 작동으로 전진하여 일으킬지도 모를 치명적 사고에 대한 우려, 이런 것이 아우러져 일어났다.

그러나 대참사의 한순간을 난 모면했다.



내 호의로 뒷좌석에 탄 동료 여직원은 늘 하던 대로 나직한 목소리로 우리 집 문안을 했고, 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운전하고 있었다.

애들 학교와 생활 여건 문제가 얘기의 중심이었고, 그런 문제로는 벌써 한고비 넘긴 여직원은 앞으로의 내 행동의 지침이 될 만한 이야기를 조용히 자기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은 앞을 보지만 신경은 온통 뒷좌석에 쏠리고 있었다. 차는 내 정신에 의존하지 못했고 단지 핸들을 붙잡은 손에, 그 손은 손을 지지하는 팔과 어깨에, 어깨는 어깨를 매달은 몸통에 의지하여 바퀴만 기계적으로 굴리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사고를 유발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음을 느끼면서 남산 일호 터널에 들어갔다.



또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모질고 끈질긴 인연으로 오늘을 있게 한 그 힘이 있을성싶은데, 그 인연이 무엇인가! 나를 이토록 사지에서 구해내시는 결정적 그 무엇을 꼭 찾아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인다.

내 생을 이끌어 마침내 나를 속절없이 잃어버린 어버이의 한을 풀어 드릴 떼까지 살게 하려는 절대자의 섭리인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내 긴 고난의 여정에서 지금 막 한고비를 또 넘겼다. 고비를 넘겨주신 그 섭리, 그 연은 여기에서 끊이지 않고 나와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 믿음으로 내일을 또 살리라./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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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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