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없는 나무는 나무라 할 수가 없겠다. 또 부실한 뿌리를 가진 나무는 쓰러지거나 바람에 송두리째 뽑힐 것인데도 뿌리를 못 내린 나는 이제까지 스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으니 아마도 뿌리를 찾아 잇대려는 열망으로 그나마 살아남은 것 아닌가 싶다. 땅 기운을 제대로 빨아올리지 못하여 성장하는 데 힘들 것이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짬을 내어 언젠가는 뿌리를 찾으리라는 생각을 늘 해왔기에 어느새 발길이 그 길로 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름대로 색깔을 칠하여 남에게 보임으로써 보이지 않는 자기를 표현하려 하고, 옷 또한 나름의 취향으로 남의 마음에 자기를 심는다. 이렇게 차별하여 인기를 끌어 우월한 지위로 이끌어가면서 제게 유리한 세상을 살려는 인류 본성을 나라고 해서 모를 리 없건만 외톨로 굴러온 밤톨이 그 많은 밤나무 중에 제 어미나무와 그 무리를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 골몰하고 있을 뿐인데, 이즈음엔 아예 발 벗고 나서서 나의 뿌리를 확인하고 내가 있는 자리를 매기기로 작정한 것까지는 그대로 잘한 것 같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아버지께 이끌리어 그 많은 선산을 두루 다녔건만 그 이름조차 알 수 없이 오늘에 이르렀거늘 이제 그분들에게 무슨 면목으로 대할까마는 그래도 용서하여 주시리라고 믿어 그분들 앞에 갈 수 있는 날을 기약하면서 줄기를 찾으려 한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선은 도서관의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낯선 그곳을 익히는 데 하루가 걸렸다. 나라고 뾰족한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니 일요일의 틈을 낼 수밖에 없는데, 다행스레 일요일에 도서관 문을 연다는, 고마운 사실이다. 얼마나 고마운가. 나 같은 사람에게 조상을 더듬는 기회를, 그것도 집안에서 누릴 수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검은색 옷으로 입어 책갈피 속에 계시는 조상을 만날 수 있으니 마음 설레고, 숨을 고르는 나, 행복하다. 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러나 첫날은 신청 절차와 족보의 유형을 익히는데 머물고 말았다. 일요일마다 끈기 있게 다녔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는 얻지 못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우리 서(徐)가의 본이 이천(利川)과 달성(達城) 두 본(本)맘 있다고 알았었는데 이렇게 많을 줄은 또 몰랐다. 다행, 난 우리 본이 ‘이천’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한결 좁혀지긴 했어도 아직은 어느 파인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눌한 나, 내 가슴을 두들긴다. 새대가리임은 자인(自認)하나 그 자인하는 것만으로는 풀리질 않으니 더욱 답답하다. 내가 잊고 있는 우리의 파(派)가 어느 것인지를 알면 훨씬 찾기가 쉬울성싶은데, 내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 분명히 그 파를 내게 이르셨을 것인데도 생각나지 않는 것은 마치 꿈결에서 내 뒤를 쫓는 살인자를 피해서 아무리 도망가도 떨어뜨릴 수 없고 그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안타까움이다. 아무리 머리를 두들겨도 머리는 늘 백지장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차근하게 훑기로 했다.
내가 알고 있기는 본(本)과 시조의 함자와 할아버지 함자와 같은 항렬의 할아버지 벌 되시는 몇 분을 알 뿐이다. 그러니 서고의 그 많은 일가의 각파 족보를 깡그리 차례로 내다 쌓아놓고 한 장씩 뒤지면서 그 몇 분의 함자를 찾기란 바닷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포기 할 수 없어서, 어떤 끄나풀이라도 잡아야, 그 끈을 실마리로 해서 풀어나가야 하겠기에, 느긋한 마음이지만 도무지 진척이 없어서 신열이 나고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
몇 달이 지났다. 그리고 난 한 가지 조건을 더 부가시켰다. 다른 방에 들어가서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년 대의 행정구역과 지명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 고향의 지금 지명과는 맞지 않는 지명들만 나왔다. 어려서 듣던 산 이름이 생각나서 그 산 이름을 한자로 바꾸어 적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조상 묘소가 태백준령의 어느 산, ‘삿갓봉’에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생각났고 그 이름을 한자음으로 적었을 것이란 생각에 그 한자를 쫓기로 했다.
립봉(?笠峰). 참으로 그럴듯한 이름이지만 모든 이의 묻힌 곳: 좌(坐) 자리를 찾기란 상당한 끈기가 필요하다. 또한 그 많은 책 속에 숨어있는 이천서가 어른 묘(좌:坐)하나 하나를 찾아 확인하는데 또 여러 달이 걸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름 하나하나에 내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이 나타날 때마다 마치 우리 할아버지를 뵙는 것처럼 반갑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 열람 대에 앉아서 눈을 비비고,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기적 같은 글자를 보았다. 눈이 확 뜨였다. 입(笠)자를 발견하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여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 줄에 쓰인 글자를 들여다보던 난 손가락 끝을 그 글자에 대고 한참 떼지 못했다. 분명 내가 떠날 때의 그 이름 석 자의 면(面) 이름은 아니지만, 머리글 한 글자만은 낯익은 글자였기 때문이다. 임남면(臨南面)이 임도면(臨道面)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조선조 초기나 고려 말에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하고 우리 군의 연혁(沿革)을 찾아보기로 하고 다음 일요일 국립도서관의 다른 방으로 찾아가서 자료를 살피는데 또 하루가 지났다. 족보 책에 올려진 지명이 어느 시기에 우리 고장의 행정구역 지명으로 되어 있었는지를 확인하고서야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우리 고장 태백산맥에 있는 산, ‘삿갓봉’과 ‘독주 꼴(獨子 洞)’이 나오는 족보는 모두 두 파에 함께 있었다. ‘양경공파’와 ‘교리공파’의 할아버지들이 이들 지역에 계시기 때문이다. 난 또 어려움에 봉착했다. 미루어 보면 두 파가 우리 고장에 함께 뿌리내리고 있다고나 할까? 미궁으로 다시 빠지고 마는 것이다.
몸은 서울 한복판 남산에 있되 마음은 누런 들판이 눈 아래 펼쳐지는 선산에서 시제(時祭)를 지낼 때로 돌아가 있다. 바람결에 날려 오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한몫으로 떡 한 꿰미를 받았다.
기름 냄새나는 둥근 메떡이 내 앞에 놓여있다.
떡이 밥이 되어 내 앞에 놓여있다.
난 머리를 가로젓는다.
서울의 한복판 국립도서관의 식당에서
점심에 숟가락을 댄다.
찰나의 여행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