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문 끝에 ‘이천서씨 대종회’가 자리한 남대문 언저리의 낡은 이층집을 찾았다.
입구에 드리운 나무 간판의 내리글씨가 유난히 헐어 있다.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조상들의 손길이 닿아 있는 듯, 허리 부분은 반들거리고 아득히 옛날의 조상 숨결이 비바람과 서리를 맞아 내렸는지 거친 나뭇결이 돋보인다.
얼마나 여러 곳을 옮겨 다녔기에 모서리가 닳아 둥글고, 걸리는 구멍은 길이로 패여 늘어있다.
간판은 이대로 조상들의 영욕을 담아 빛바랜 채 말없이 후손을 맞는다.
난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른손의 가방을 왼손에 옮겨 들고 오른손바닥으로 서(徐)자를 만지면서 눈을 감는다.
아버지께서 내 작은 손과 붓대를 함께 잡으시고 힘 있게 서(徐)자의 획에 힘의 강약을 주어 가르쳐주시던, 그 옛날 어릴 적 회상에 잠시 잠긴다.
층계의 나무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써 내 정신으로 돌아와 왼손의 손가방을 오른손에 옮겨 든다.
어른에게 바치는 모든 물건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오른손 밑에 받혀서 올리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더불어 생각났기에 무의식중에 오른손으로 만진 것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생각났다.
늘 반듯한 생활을 가르치신 어버이의 마음이 되새겨지는 검은 글씨의 간판이다.
반기는 일가분들의 정성스러운 안내로 소장된 책들은 모두 며칠을 두고 살폈으나 이곳 역시 나의 기대에 못 미쳤다.
1925년에 만든 족보에는 산소의 이름이 우리 고향의 산 이름과 같아서 우리의 조상인 듯싶은 분의 함자는 있으나 그에 딸린 후손은 공백으로 되어있다. 분명 우리 집안 가계의 뿌리인 듯싶다.
그런데 해방 후에 만든 족보에는 고향의 선조인 듯싶은 할아버지 밑으로 그 후손들이 주르륵 달려있으니, 우리의 뿌리는 잇댈 자리가 없어졌다. 모름지기 비어있는 자리에 누군가가 잇댄 것, 틀림없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고 또 한 번 맥 빠지는 긴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꼴이다. 그렇지만 이대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나보다 연장인 여러 어른, 남쪽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몇 안 되는 어른들의 바람은 좌절되는 것일까? 좌절? 생각조차 하기 싫다. 하지만 어찌하려나. 내 힘과 우리의 힘이 여기까지인 것을.
관심 있는 많은 분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옷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연만하신 분들의 초조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대로 날아가서 묻고 확인하고 오지 않으면 못 견딜 것같이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하지만 휴전선 이북이니 어쩔 수 없어 마음을 돌리니 발걸음은 비로써 떨어진다.
나무계단을 내려오는 내 발은 어느새 고향 집의 다락방을 내려온다.
그래도 일가들은 조상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내 이야기도 들어주고, 끝까지 찾아 나서는 그 고마움이 나를 고향 집으로 인도한 듯, 나는 우리 집 다락방에서 내려온다.
대종회 나무 간판이 우리 집의 여인숙 간판으로 겹쳐 보인다. 마음만은 아늑하고 평화롭다. 혈육의 울타리가 찬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이제부터 여기를 기점으로 내 뿌리 모두를 찾으리라! 풀어가리라!/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