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에 있는 ‘이천서씨 족보 편찬소’라는 곳을 수소문해서 찾았지만 역시 또렷한 진전은 없었다. 그러나 ‘이천’ 본향에 가서 그곳 어른들을 만나보면 혹시 알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사무장이 조용히 펴 이야기하기에 들었다. 물불을 가릴 수 없던 나는 나의 뿌리에 관한 어떤 정보든지 모두 새로웠기에 말을 자르지 않고 조용히 들어보았다. 처음으로 일가 족보를 더듬는 나를 가엽게 여겼던지 자기가 동행할 테니 날을 받자고 하기에 얼른 승낙했다.
그날, 일요일을 잡아서 인천 형님과 함께 승용차로 그 일가 젊은 사람을 만나서 동대문을 떠났다. 초행이니 지도를 더듬고 길을 몇 번이고 되돌아 맴돌면서 경기도 이천을 찾아갔다. 먼지를 뽀얗게 흩날리면서 찾아간 곳은, 하마(下馬)비가 서 있는 ‘설봉(雪峰)서원’이다. 왕세자를 가르치셨다는 곳,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그곳, 옷깃을 여미고 섰노라니 선조들의 충절이 지금의 나를 순종(順從)의 기질로 물러 주셨다고 생각게 한다.
족보에 대한 정보는 아예 생각할 수조차 없이 바쁘게 몰아치는 답사의 길이다. ‘설봉서원’을 떠나서 ‘장위공’ 할아버지 동상 앞에 서서는 잠시 숙연하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거란의 백만 대군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장을 설복(說服)시켜서 물러가게 하신 그 할아버지의 행적은 모름지기 오늘의 국방과 외교가 가야 할 참 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조상의 동상 앞에 서 있으려니 그 순간 바로 내 혼에 그분의 맥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께서 내려다보시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못난 후손이 되지 마라!’ 그리고 ‘무슨 고난이 닥쳐도 굴하지 말고 뚫거라!’ 는 말씀이 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미처 알지 못하고 미처 듣지 못했던 우리 선조들의 근면과 성실이 뼈에 배어있다.
시조께서는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감추어 주었더니 꿈에 나타난 옥황상제께서 상을 내리시었다. 후손들의 번창과 영화를 내려 주셨는데 칠십 고령에 아들을 보았고 그 후 자자손손이 공명을 떨쳤다. 그래서 나라에 공헌하는 은공을 받았으니 바로 우리의 조상이신 이 어른이 신라 아간(阿干) 공 서신일(神逸) 할아버지이시다.
줄기만 찾으면 되는 내 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아마도 조상의 얼을 살려 마음과 몸을 다하지 않은 내 탓임을 오늘에 깨닫는다. 이 어른께 향하지 못한 탓을 꾸짖는 타이름으로 여겨서 적으나마 안심이 되는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어른들의 힘으로 나의 뜻이 이룩되도록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록 갔던 일이 하나도 이룩되질 않았어도 마음은 지극히 평온하다.
아버지! 왜 좀 더 제가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매질이라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쯤 아버지의 그 사랑의 매가 있었던들 저로 하여 잊히지 않는 조상의 뿌리를 쉽게 확실히 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셨으면 제가 이렇게 막막해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다가오지만 이 또한 우리 조상의 사슴 숨겨주기의 착하신 심성이 천년을 지난 오늘까지 이어 온 것이기에 아버지께 감사하고, 참으로 핏속에 흐르는 올곧음이 서(徐)가라는 성씨와 함께 씻기지 않는 것을 머리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