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어버린 공책에는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고 손바닥만 한 수첩은 네 귀가 닳아서 너덜거린다. 수첩 장마다 넘겨 보아도 막막하고, 손가락으로 아무리 꼭꼭 짚어보아도 깜깜하기는 마찬가지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아도 무슨 수가 날 것 같지는 않다. 공책을 펴서 이리 맞추고 저리 붙여 봐도 여전히 아귀 안 맞는 내 조상의 뼈대는 두 마디가 없어 맞춰 볼 수가 없다. 한 허리가 없는 내 조상. 나는 미칠 것만 같다. 이대로는 밑도 끝도 없는 조상 찾기의 이 한 생을 다 보낸대도 가운데 양대(兩代)의 어른 함자를 알 재주도 없고 찾을 방도도 없을 것 같다. 들여다보고 들여다볼 뿐. 긴 한숨만 세어 책장만 절로 넘어간다.
드디어 밀어제치고 뒤로 벌렁 드러눕고, 하얀 천장을 올려보니 거기에 조상이 어린다. 눈을 감아 버린다.
고향마을의 우리 집에 들어갔다. 거기엔 아무도 없다. 빈방만 덩그렇다. 눈을 떴다. 이대로 있기는 억울하다. 하소연할 데 없는 답답한 이 순간이 나를 미치도록 한다. 난 미칠 것 같다.
이 대로 미국 이민할까. 그래서 거기에서 고향으로 들어가 내가 모르고 있는 조상의 모든 걸 알아 올까? 이런 생각이 미치자, 이번에는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 벌이는 어떻게 하고 애들 학교는 또 어떻게 하고 아내와는 어떻게 이별하고…. 겹겹이 채워지는 현실의 족쇄가 나를 주저앉힌다. 그러나 상상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진다. 멈추질 않는다.
상상의 나래는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펼쳐지는 것인가! 가보지 않은 이민을 그리기란 그렇다. 홀로 이민 간 난 우선 일터를 구하고 다음은 여비를 마련하고 그리고는 북한행 비자를 받고 그런 다음 뜻을 둔 친구를 물색하고 그와 함께 북으로 잠입한다. 난 제삼국 국적자이니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이 자유롭게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우리 부모와 내 형제를 찾아 나설 것이고, 만약 생존해 계시지 않는다면 그 묘소를 찾아서 천만번의 절로 내 울분을 달랠 것이다. 어쩔 수 없었던 나의 불효를 털어놓고 사죄로 조상의 은덕을 입고 비로써 그 자리를 떠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의 일가를 찾아서 북한 전역을 헤맬 것이다. 어떻게 하던, 나의 파와 두 대에 걸친 할아버지의 함자를, 그리고 그 할아버지들의 묘소를 찾아서 참배하고 속죄하리라. 다행으로 형제간이라도 만나서 그들이 나보다 낫게 우리 조상의 내력을 알아 꿰고 있다면 더없이 고맙고 반갑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이 앞서서 일가를 찾아 나설 것임에 난 한결 수월하게 뜻한 바를 이룰지도 모른다. 비로써 난 쾌재를 부르고 날짜가 되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역이민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이 답사에서 얻은 자료로써 우리의 족보를 완성하고 이 세상을 떠날 날을 기다리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것이다.
이렇게라도 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
난 갇힌 몸에다 닫힌 마음조차 열지 못하는 죽은 삶인가!?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