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탕

외통인생 2008. 11. 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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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은 이렇다. 내가 퇴직 후에라도 후임자들이 회사의 업무를 매끄럽게 수행되도록 돌보아 주고 회사가 어려운 이즈음에 그 사정을 생각해서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숨은 뜻은 송사의 핵심을 비켜나가게 되는 나를 어떻게든지 붙잡아 두어서 송사에서의 용도를 극대화하려는 회사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난 나의 회사 기여 목적의 끝마무리를 깨끗이 하는 것이 떳떳하리라 생각하여 승낙했다. 더욱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은 아내의 권유에서였다. 언제 내 쓰임새가 다하여질지는 대표이사나 배후 조종자나 변호사도 모르는 처지이니 우선은 흘러가는 대로 볼밖에 없는 회사의 입장세서나 경영진의 처지로서는 어찌 됐든 내 퇴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의 양해를 구하는 데는 적잖이 신경을 써야 했다. 아내는 정년 연장 기간이 길지 않게 승낙할 것을 제안했다. 난 아내의 뜻을 담아 회사에 사정을 털어놓고 나서 계속 출근하게 되었다.

짙은 안개 속을 더듬으며 갈 길을 찾는 임원들의 들리지 않는 고함이 내 시야에 와 닿는다. 몸짓과 시선이 그렇게 다가오고 있다. 그들은 조심스레 나를 대했다.

만약 내가 실황을 밝힌다면 이제까지의 송사에서 있었던 내용이 다시 얽은 실타래처럼 되어 회사는 지극히 불리한 입장이 될 것은 빤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내가 변호사와 호흡을 맞추어 일관된 항변으로 기소 내용을 부인한다면 그들은 내 뒤에 숨어서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며 회사에서는 머리 드는 입지에 놓이게 되고 의자도 앉아 있을 수 있을 만큼 편안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처지에서 이미 우려낼 대로 우려낸 내 몸이나 머리통에서 더 나올 것은 그저 그들의 불안을 메워줄 위장된 주도적 역할 배역의 소화된 언행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냥 진실을 외면하면서 그늘에서 웅크려 지내고 있다.

약을 대리는 데 그 약의 성분을 죄다 우려내려면 초탕으로만은 만족할 만한 약효를 낼 수 없었던지, 옛사람들은 반드시 재탕했고 그것도 미심쩍어서 재탕한 두 첩의 탕 재를 한데 모아 삼 탕을 했으니, 약재에 들어있는 약효는 그제야 송두리째 우러났고 그 약을 먹은 환자는 그래서 마음은 솜털처럼, 몸은 가을 망아지처럼 되었으리라. 내 꼴이 약재가 되어서 2년 지연 퇴직한다면 아마도 내 희생으로 덕을 보게 되는 회사나 부실한 간부들은 적잖이 날뛸 것이다.

이런 속셈으로 회사에 나가는 내 차바퀴의 소리가 오늘따라 유달리 크게 들리니 내 심경이 열려있음이로다. 일어나는 모든 질서의 극미한 일부분임을 알아 참여하고자 하는 내심을 버릴 수 없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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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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