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이따금 아쉬워서 할 때가 있다. 일이 다 지난 뒤에 뒤늦게 알게 된 때나 누가 일러주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알게 됐을 때, 고독감과 함께 배신감도 들며 때로는 스스로 한계에 실망할 때도 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꼭 내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오만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수습이 되어있을 때, 그것이 내 주위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더욱 위축된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내 통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생각은 해선 안 될 것인데도 마음에 그늘이 드리운다. 우리들의 실상(實狀)을 내가 아는 것이란 티끌만치도 안 될 것인데 안달하는 것이 더 우습다.
한데, 지금도 내밀한 어느 곳에선 나를 제쳐놓고 저들끼리만 속닥거리고 저들의 놀음으로 쾌재를 부른다고 생각하니 이젠 예전과 같이 고독하거나 우울한 그늘이 드리워지지를 않고 울화가 치민다. 아마도 내가 갈 길은 먼데, 기력은 소진하여 남은 길을 갈 것 같지 않은 직감 같은 것이 발동하여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내 삶에서, 곧 산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어둠이 깔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평생의 한이 서린 응어리가 점점 굳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만 모르고 나만 제자리 맴돌면서 그림 그리는지 모르겠다. 종이도 연필도 더구나 색연필이나 그림물감은 당치도 않은 사치품이다. 그냥 그들은 하얀 종이 위에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한껏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나는 꿈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눈만 감으면 온갖 그림 도구가 일순에 모여들고, 나는 손도 대지 않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내 집을 기점으로 하여 신작로 길 위로 아래로 마구 그려나간다. 그러나 물이 흐르는 역방향으로 올라가기 일쑤다. 그것은 아마도 그쪽이 윗마을이고 우리가 사는 곳이 아랫마을이라서 그냥 저절로 내 생각이 그렇게 이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학교로 가는 길이 그쪽이라서 더 내 머리에 생생하여 그렇게 되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아래로 내려가는 기회보다는 많은 까닭일 테다.
실성한 사람처럼 종이 위에다가 그리고 지우고, 그리고 지우는 짓을 할 수는 없으니, 마음의 그림으로 그리기를 한평생, 밤마다 그리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어느덧 내 생리적 융합으로까지 되어버렸다. 숱한 노랫말과 주옥같은 작품에도 내 고향은 안 그려지고 산을 옮겨주겠다는 정치가의 포효도 태양계를 정복하겠다는 센 나라들의 우주 계획도 내 고향을 그리는 내 마음을 그려주지 못하고 밝혀주지 못한다. 가물거리는 얼굴들을 잊지 않으려고, 그 얼굴들을 가두려고 망을 치듯 그려나가는 이웃의 집, 집, 마당, 마당이다.
어쩐지 해가 갈수록 한 집씩, 지워질 것 같은 불안과 더는 이어 못 그릴 것 같은 초조함도 겹친다. 그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려대는 고향의 신작로, 거기가 아스팔트 길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 길을 걷다가 바짓가랑이가 흙먼지로 물들었을 때 털 수 있는 멈춤이 있으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네의 집들을 다 그려본 적은 없다. 자장가를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니 고향의 포근함이 더할 수 없이 아늑하다.
그렇다. 도화지 위에 그리지 않는 그림은 영원의 그림이다.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흘러가는 그림, 내 의식 안에서 생동하는 우리 동네 그림이다. 이 그림은 저녁마다 잠들기 전에 기도하듯이 그리는 내 삶이 동인(動因)이 되어 오늘을 쉬게 하는 한편 내일을 위해서 아침에 하얗게 지워진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누가 탓하면 그래도 나는 좋다고 대답하고, 미친 짓이라고 말하면 나는 미쳐 가는 중이라고, 너는 미칠 수 없다고, 너는 미쳐지질 않는다고 말하면서 밤이 오길 손꼽을 것이다.
한낮에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온 세상 것이 일시에 몰려들어 엉망으로 되어버리는 그림이고 눈을 감고 있어도 온갖 잡동사니가 고향마을에 쏟아진다. 햇빛은 바탕을 비우고 바람은 집들을 날리고 싹트는 소리는 내 발길을 돌리고 잎 나는 소리는 고개를 올리게 하여 집에서 멀어지고, 단풍 지는 소리는 나를 마을을 떠나 산으로 달리게 하고, 낙엽이 져 떨어지는 소리는 나를 김장밭으로 내몰고, 눈 오는 소리는 나를 참새잡이 길로 모니, 그림을 완성할 수가 없다. 그리다가 한편으로 지워지는, 내 그림은 꿈길에서만 그려진다. 그리고 그 채로 고향에서 잔다.
나는 마을의 집들을 차례로 연이어서 그려야 하는, 그래야 내가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이란 최면을 내게 걸고 평생을 살고 있다. 이런 그림을 나는 남이 모르게 그리고 있으니 나 몰래 하는 것들을 내가 남들을 탓하기에 걸맞지 않은 내 짓이고 생각이다.
너무 작아서, 있는 듯 마는듯한 나의 실체에서도 그 속에 간직한 보이지 않는 꿈의 그림을 생각할 세상의 위인은 어디에서 내 모를 또 다른 일을 꾸미면서 나를 외면하고 저들끼리 키득거릴까!? 제발 내 영혼의 색연필이 닳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다오! 그리고 내 꿈이 깨어져도 좋을 현실적 그림을 내 앞에 펼쳐다오! 그만, 나를 따돌리지 말아다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