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아름답다고 하면 나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할 테지만 미쳐보고 싶어 뇌어 본다.
그야 내 눈에 아름답게 보여서가 아니라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어서, 어떻게 하든 아름답게 느끼고 싶어서 안달한다. 내가 아름다우면 말할 나위 없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할 테지만 난 그렇지 못한데도 아름답게 보고 싶어서 우겨본다.
내 눈으로 보아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모든 사물은 나름의 짝이 있을 것이기에 그 짝에게는 상대가 어떻게 생겼더라도 아름답게 여긴다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추물인데도 그를 아름답게 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부닥쳐서는 역시 무언가 깊고 내밀한 곳에 숨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내 눈에 비친 모든 상(像)을 흘릴 수가 없다.
너나없이 혐오하는 짐승도 그들 중 어느 짝이 그를 아름답게 보아 짝 짖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미적 감각이 없이 본능적으로, 우생학적 발작 때문에 짝 짖는다고 한들 그 짐승이 되어보지 않은 이상 극단적으로 부정할 일은 아닌데,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인간만 있다고 할 수 없다. 우리 인간 표현능력의 우월성에 바탕을 둔 아름다움은 인간중심의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겠거늘 피조물로서의 아우름에 있는 인간은 인간끼리의 기준으로 인간들만의 언어로서의 감정표현 형식인 아름다움에 한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외면하는 다른 것들의 미적 기준과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반드시 대응되는 사랑의 근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루어진 상태이거나 원초적이거나를 따지기 전에 존재하는 그것만으로 짝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생각하는 모두의 존재 이유가 설명되는 것이다. 있는 것, 그것은 어딘가의 필요로 있다고 생각하는 실마리에서 짝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 즉 미적 가치가 형성될 성싶다.
그래서 우리가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추하다고 여기는 쪽에서 보면 하나도 예쁘지 않을뿐더러 밉고 무섭게만 보일 것이니 우리도 미(美)에 대한 우리식 가치를 상대적으로 같게 놓고 만물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할 참이다.
우리 인간의 손을 거친 것들에는 손사래를 덜 치지만 동물에 한해서만은 그렇지 못한데, 그렇지만 더러는 사람의 기준을 준용해서 집안으로 들이고 가까이하고 쓰다듬는 친절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의 아름다운 본질을 모르고 하는 짓이다. 사람의 기준으로, 그들과는 전혀 이룰 수 없는 짝이어서 아름답게 보일 수 없는데, 단지 노리개로 좋아할 뿐임을 알 때, 정녕 그것은 미의 경지로 끌어들인 것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볼 것인가? 종(種)을 달리한 눈으로 보아야 비로써 가능할 것이고 그런 눈은 오만의 눈꺼풀을 벗기면서 비롯될 것이다.
갈 때,
빈 오솔길.
어머니가 잡아준 방아다리
엄지 검지 힘 힘주어
오는 길,
청개구리 윤기 나네.
푸른 들
푸른 방아다리
푸른 청개구리
내 푸른 눈.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