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예사로이 여겼던 사상(事象)이 새롭게 내게 다가오는 이즈음이다. 이별의 아픔이 녹아 스미더니 둔갑(遁甲:?)하는 것인지, 새 의미를 담게 되는 게, 한둘이 아니다. 마음이 우울한 계절, 그중에서도 늦은 가을의 정경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가까이에 있던 산은 멀리 뒷걸음쳐서 낮아지고 눈앞의 풀 섶은 바싹바싹 말라 부서져 흩어지는 가을, 나를 고향의 들판 위로 빨아들이는 짙은 늦가을이 그렇다. 가랑잎이 바람을 타고 둑 밑에 굴러 쌓일 때면 만상은 지난 영화를 묻어버리고, 땅 위의 초록 살결은 어느새 뼈마디가 드러나면서 돌무더기와 바윗덩이가 딱지처럼 보이는데, 이때쯤이면 난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는다.
내 마음은 골짜기 막바지에 이르고, 다시 눈을 떠서 고개를 위로하여 좁아진 마음의 하늘을 올려본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었다. 만물이 적막에 싸이건 말건 알알이 벗겨지건 말건 아랑곳없이 사람은 극성으로 날뛰는데, 홀로 잠드는 저것들을 연민으로 대하는구나 싶어서 더 서글프다. 해를 거듭할수록 애련해지는 사철 중의 한 계절, 곧 겨울을 채비하는 늦가을이 나를 아득히 먼 곳으로 이끌어 가면서 망상(萬象)에 젖게 한다.
바람에 할퀴어 벗겨진 들판 위에 우르르 밀어닥칠 겨울을 따뜻한 봄날의 들녘처럼 만드는 힘이 우리에겐 없으니 내가 정성을 들여 가꾸는 호두나무라 하여 달리 더 감쌀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외톨이 되고서부터 나무라도 심어 가꾸며 그들과 말하면서 내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 그런 유일한 내 말 상대인 호두나무를 괴롭히는 잡풀이 있어 애를 태운다. 이를 억누를 수 있는 자연의 특별한 보살핌은 감히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내 힘이 닿는 대로 푸른 풀밭을 만들련다. 무엇인가를 심어서 사철을 푸르게 하여 호두나무를 편안하게 하여 내가 즐기리라. 내가 심어 놓은 나무를 잘 자라게 하려고 경외(敬畏)하는 섭리에 감히 참여하려 한다.
그중 한 가지가 토기 풀뿐인가 싶어서, 마음이 그리 쏠려 몸부림친 지 한해가 지났건만 아직은 원대로 되지 못했다. 섭리를 거역하는 오만한 내 마음을 사려 들여야 마땅하련만 그렇게 못하고 있다. 자연의 일부인 나에게도 경외의 손길이 뻗는다면, 그 섭리의 일부가 나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면, 마침내 내 꿈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고집스러운 생각을 떨칠 수 없고, 그래서 생태를 흩을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이 일에서 내 손을 떼지 못한다.
늘 바라보는 그곳, 가을이면 호두나무야 어쩔 수 없이 잎을 털어 내려놓더라도 그 나무가 서 있는 바닥을 토기 풀이 파랗게 깔아 준다면 이 얼마나 보기 좋겠는가 싶어서, 남이야 미친놈이라 할 터이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으니 어찌 손을 놓으랴!
농사짓는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고약한 풀이 바로 토끼풀이라며 한사코 캐내 버리는, 바로 그 풀을 오히려 난 가꾸려고 고집한다. 뽑아도 나고 뽑아도 또 살아나는 질긴 생명력이 있기에 모든 이들과 다르게 난 이 풀을 마음에 둔다. 게다가 키도 그리 크지 않아서 내가 심은 호두나무를 넘보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 언저리를 푸르게 할성싶으니, 남들은 다 뭐라 해도 나는 이 일을 한다.
더구나 사철을 푸르게 자라고 웬만한 추위에도 죽지 않는 여러해살이풀이니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드는 풀이다. 잡풀 베기 일에 지친 내가 잔꾀를 내어 마침내 자연을 손질하는 심사로까지 되어버린 내가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분에 넘치는 중장비를 감당하며 호두나무 사이를 갈아엎어 잡초를 말끔히 없애고 가루처럼 보드라운 토끼풀 씨앗을 이태에 걸쳐서 뿌렸지만, 속 시원하게 돋아나지 않았고 종자를 알 수 없는 풀이 온 밭을 덮었다. 잡풀 씨가 여물대로 여물어서 떨어질 늦가을에 온 밭을 파서 엎었기 때문이다.
온갖 풀을 흔들어 놓았으니 말끔한 밭에 그대로 잡풀 씨가 뿌려진 것을 내가 알 리는 없었다. 그야말로 그 밭에 걸맞은 풀이 텃세로 무성히 땅을 덮고 있다.
갖가지 풀의 새싹이 떡잎을 낼 때라야 알아볼 수 있었으니 난 그때까지는 밭에 난 모든 풀을 토끼풀로만 여기고 기뻐했었다. 그러던 내가 당황한 것은 이 풀이 떡잎을 지울 무렵에서였다. 그때 비로써 가려볼 수 있었는데 모두가 잡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뿌린 씨는 가물에 콩 나듯 하고 내가 뿌리지도 않은 씨앗이 무더기로 났으니, 제 땅에 걸맞은 풀이 기승을 부림은 당연한데도 토속 풀을 원망하면서 봄철 내내 이놈들과 싸운 바보 같았던 나를 뉘우치지만, 그래도 끝은 보리라는 생각에서 지금도 한 포기의 토기 풀을 감싸고 북돋운다.
열매를 맺어 실속을 챙겨 주는 것도 아니고 뿌리를 내려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닌 이 토끼풀을 난 한 포기라도 더 살리려고 정성을 다한다. 꽃반지의 무지개나 네 잎의 행운은 먼 옛것인지 오래고, 남들이 뭐라든지 세 잎 풀잎이 나의 전부가 되어버린 지금, 풀이 돋아난 이른 봄부터 일 년 내내 풀과 싸우고 있다. 이런 나를 이웃 사람들은 더러는 나를 위로하며 잡풀 없애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일러오지만, 난 제초제는 내 나무에 해가 될까, 싶어서 싫고, 품을 사서 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큰 꼴이니 이 또한 싫다. 차라리 풀 냄새를 맡으면서 흙을 파고 풀뿌리를 쫓아 하나하나 캐어가고 싶다.
이미 갈대밭이 된 포지(圃地), 산딸기밭이 되어버린 땅, 물봉숭아가 덮어버린 밭이 되었는데 중장비가 아무리 힘이 세도 어찌 길길이 뻗어간 산딸기 뿌리와 갈뿌리를 없앨 수 있었겠는가! 중장비도 못 당했는데 품을 사서 캔다고 한들 그 결과는 다음 해라야 나타나니 차라리 내가 가닥가닥 일일이 찾아 캐어 없앨 수밖에 없다.
비록 힘들고 지루한 일이지만 포장(圃場)을 내 마음에 들게 가꾸면서 내 손으로 호두나무를 돌보게 되는 것이니, 그래서 차라리 이 일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이는 내가 심은 호두나무와 내가 뿌린 토끼풀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조화로운 나의 그림이고 기쁨이다.
오늘도 갈 때 뿌리를 캐 없애려고 봉긋이 돋아 있는 돌부리 언저리에 박힌 갈뿌리를 훑는다. 뿌리는 점점 깊이 돌 밑에 숨어들고, 박힌 돌은 점점 드러나며 몸집을 키운다. 그 돌 밑을 밀가루 반죽에 젓가락 꽂듯이 뚫고 들어간 갈뿌리가 야속하기만 하다.
오늘 이 갈대 뿌리를 캐지 않는다면 이때까지 내가 한 고생은 허사가 되고 또다시 갈대밭이 될 것으로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갈대 뿌리만은 깡그리 드러내어 그 끝을 보고 멀리 개울가로 내동댕이치지 않고서는 일손을 놓을 수가 없다.
주춧돌만 한 돌을 들어내고 그 밑에 들어있는 갈대 뿌리만은 어떻게든 파내야겠는데 돌을 들어낼 힘은 달리고, 그렇다고 그냥 놓아두면 이 한 갈대 뿌리로 하여 내 꿈은 사라질 것이니 시작을 안 하느니만 못할 것이다. 하여 마냥 있는 날인데도 백 리가 넘는 거리를 꼭두새벽에 일어나 길을 나선다.
지렛대로 아름드리 돌을 또 괴고 그사이에 알맞게 들어갈 돌을 집어넣고 다시 돌을 지렛대로 또 괴고 그 벌어진 틈에 알맞은 돌을 또 집어넣어서 큰 돌을 그만큼 씩 위로 오린다. 몇 시간이 걸린들 무슨 상관이랴. 어린아이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갈대 뿌리를 끝까지 뽑아 들어내기 위해서 이렇게 노심초사하지만, 성취감은 그저 그만이다.
드디어 돌머리 한쪽이 땅 위로 올라왔지만, 맞은 편 돌부리는 아직도 땅속 깊이 묻혀있다. 이번에는 맞은편에 주저앉아서 같은 방법으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되풀이한다. 마침내 남은 돌부리도 땅 위에 올라오게 된다. 그런 다음 이 돌을 구덩이 옆으로 옮겨놓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작은 돌들이 가득한 지면에 있는 이 돌을 지렛대로 손톱만큼씩 옆으로 움직여서 완전히 구덩이 밖으로 옮긴다.
다음, 구덩이에 차 있는 작은 돌들을 하나하나 들어내고서 갈뿌리를 드러낸다. 흐뭇하다. 태산을 들어낸들 이처럼 후련할 수는 없으리라. 되묻는 일은 돌을 지렛대로 다시 움직여서 밀어 넣고 잔돌을 묻고 흙을 덮는다.
구덩이를 팔 때마다 토끼풀이 건들어지는데, 이 한 포기의 토끼풀이 소중한 내 몸 같아서 알뜰히 보살피게 됨은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기이한 행동이다. 한 포기가 뿌리째 드러나면 이를 양손으로 떠받들고 정성스레 옮겨 심는 내가 오히려 조마조마하다. 죽을 가보아 안쓰럽다.
어찌하여 같은 풀인데 내가 마음을 두는 풀은 예뻐 보이고 정성을 다해 보살피면서도 내가 버린 풀은 그렇게 얄밉고 저주스러운가? 모두가 한결같은 절대자 섭리의 한 부분인데, 마음속 한구석에 응어리가 남는다.
그래도 난 아직 토기 풀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