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어린 시절이 그립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서 아롱이는 무지개 꿈도 다시 꾸고 싶고 한껏 부푼 기대에 다시 한번 설레어 보고 싶다. 몸이 쪼여 드는 자릿한 소싯적 흥분을 맛보고 싶지만, 그것은 잡히지 않는 꿈속의 꿈인 것이다. 동요 속의 토끼처럼 예쁜 몸짓도 하고 싶고 유행가의 가사처럼 동심에 한껏 젖어 뛰놀고도 싶다. 뒷동산에 올라 알뜰하게 가꾸던 꿈, 잊지 못한 시절이다.
어찌 이토록 끌리는지 모르겠다. 지상에 용출(湧出)하여 한세상 사는 포물선의 마지막 한 점에 위치하여 맞은편에 그려진 부드럽고 연하면서도 탄력 있는 그 시절의 선을 만져보고 품에 안아 보고 싶다. 모든 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 시절, 그렇게 다가오는 포만(飽滿)감에 미소 짓다 취하여 잠시 눈감았던 시절, 보이는 것 모두가 신기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던 때, 난 그때를 평생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꿈을 먹던 시절은 어느덧 가고, 하늘을 찌를 기상은 펴지도 못한 채 탄력을 잃으면서 꿈은 깨지고 생시로 되돌아오고, 꿈이고 싶은 아쉬움을 확인하려고 꼬집지만, 현실은 아프다. 장벽이 쌓이는 포물선의 정점에선 불안한 미래와 아롱이는 과거가 함께 그리움과 두려움으로 균형 잡히더니 반환점의 한계에 다다른 무력은 가속도로 내리꽂히다가 이제 꿈은커녕 아득한 나락의 공포만 눈앞에 다가온다.
곱씹을 과거가 없으니, 회상이 이을 수 없고 회상이 없으니 그리움이 없을 뿐일 것이라고 하기엔 석연하게 풀리지 않는 청춘의 약동, 여리면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유년의 꿈길이 이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파고듦은 한 생의 노을 길에 어쩔 수 없는, 차라리 탄생과 소멸의 양 끝에 뿌리박은 포물선 인생의 대안(對岸)에 펼쳐지는 무지개다. 쌍무지개의 한 뿌리는 용출(湧出)의 탄생에 연유하고 다른 한 뿌리는 소멸의 포용에 흡입되어 아름답게 인생 역정으로 그어진 포물선을, 아니 쌍무지개를 물들이고 있다.
날 때와 질 때의 의미가 같으련만 지금에 와서 어린 시절의 그리움은 어쩐 일인고? 어쩌면 꽉 막힌 황혼 길에서 바라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의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쌍무지개의 보이지 않는 나머지 반원(半圓)을 그려보며, 지금의 황혼 길이 새로운 세상의 꿈길로 이어지는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고 또 이 삶의 소멸이 쌍무지개 뒤 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쌍무지개로 펼쳐진다고 할 때 의미는 달라질 것 같다. 그래야 비로써 우리가 온전하게 될 것이고 비로써 내 어린 시절은 지금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미래의 또 다른 내 어린 시절이 된다고 하겠다.
이럴 때, 내 유년의 그리움은 새로운 무지개 꿈의 환희와 흥분으로 바뀌고 이미 흘러가 버린 유년의 세월이 현실로 다가와서 나를 용약(踊躍) 시킬 것이다. 그리움은 없어지고 새 삶의 보람이 넘칠 것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