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守初 (여수초) *호가 수초인 친구에게 준 시
이 몸이 배가 되어
常願身爲萬斛舟 (상원신위만곡주)
나는 항상 소망하지 곡식 만 섬을 싣는 배가 되었으면,
中間寬處起柁樓 (중간관처기타루)
배 안 넓은 곳에 다락을 세웠으면 하고
時來濟盡東南客 (시래제진동남객)
동으로 남으로 가는 나그네를 때가 되면 모두 건네주고
日暮無心穩泛遊 (일모무심온범유)
해 질 녘에는 무심히 두둥실 노닐었으면 하고.
/이항복(李恒福·1556~1618)
백사(白沙) 이항복이 청년 시절에 지은 시다. 백사는 친구들과 강을 건너려고 배를 기다렸으나 며칠 동안이나 구할 수 없었다. 모두들 몹시 답답해하며 화를 낼 때 백사가 장난 삼아 이 시를 써서 그들을 달랬다.
'나는 큰 배가 되어 강을 건너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건네주고 그 뒤에 여유롭게 배를 띄우고 노는 게 꿈이야. 며칠 기다리는 정도 가지고 왜 이리 조바심들이냐?' 다른 사람들이 감정을 주체 못할 때 남과 사회를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희생과 인생의 여유까지 보여준다. 대인다운 풍모가 엿보이는 명작이다.
험한 세상을 건네주는 큰 배가 되겠다는 청년의 꿈은 뒷날 임진왜란이란 국난을 온몸으로 헤쳐가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은 큰 정치가로 실현되었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