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젓한 집 (幽居·유거)
春草上巖扉(춘초상암비) 봄풀이 사립문에 오른 곳
幽居塵事稀(유거진사희) 숨어 살아 세속의 일 드무네
花低香襲枕(화저향습침) 꽃이 나직해 향기 베개에 스미고
山近翠生衣(산근취생의) 산이 가까워 비췻빛 옷에 물드네
雨細池中見(우세지중견) 가는 빗방울 못물에서나 보이고
風微柳上知(풍미유상지) 약한 바람 버들 끝에서나 알겠네
天機無跡處(천기무적처) 천기(天機)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곳
淡不與心違(담불여심위) 담담하여 마음과 어긋나지 않네
/송익필(宋翼弼:1534-1599)
자연의 변화가 주는 멋은 번잡한 도회지보다는 호젓한 산속에 숨어 사는 이의 거처에서 더 잘 보인다. 고독과 고요함을 즐긴 유학자 송익필에게는 그 변화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베개에 스미는 향기, 옷에 물드는 푸른빛, 너무 가늘어 연못의 물을 봐야만 떨어지는 줄 아는 빗방울, 버들가지 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람 등은 혹시라도 사람이 알아차릴까 봐 염려하는 듯 소리도 없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렇게 왔다가 가는 것이 자연의 이법, 즉 천기(天機)다. 호젓한 곳에 머무니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는 듯 담담해진다. 세속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은 가끔 그 호젓함이 부럽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