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좋으면
가끔 찾아와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덜 자란 풀꽃 붉게 물들이던 말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말한 게 다인 말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 /김해자
여기 소꿉놀이를 하며 노는 풍경이 있다. 돌 밥상 위에 흙으로는 밥을 지어 내놓았고, 풀꽃으로는 곁들여 먹을 반찬을 장만하여 내놓았다. 그러곤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한다. 한 명은 신부가 되어서, 또 한 명은 갓 결혼한 사내가 되어서. 돌 밥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둘은 절로 수줍어져 연지를 바른 듯 뺨이 붉어졌겠다.
사내아이는 경상도 말투로"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라고 말한다. 무심하게 무뚝뚝하게 그리 말했을 것이다. 그 말이 여자아이의 발등 아래로 툭 떨어졌을 것이다.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아, 이 말은 얼마나 진심이 담긴 말인가. 얼마나 깨끗하고 어마어마한 말인가. 이 말은 세월이 흘러도 푸른 우물물처럼 가슴에 내내 차오르겠다. //문태준·시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