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응렴(膺廉)이 왕위에 올랐다. 신라 48대 경문왕이 바로 그다. 왕이 되고 나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밤마다 침전에 뱀 떼가 몰려들었다. 궁인들이 놀라 몰아내려 하자, 왕이 말했다. "과인은 뱀이 없으면 잠을 편히 못 잔다. 놔두어라." 게다가 왕은 잘 때마다 혀를 내밀고 잤다. 혀가 어찌나 길고 넓은지 배를 온통 덮을 정도였다. 귀도 길어져서 당나귀 귀가 되었다.
흔히 뱀의 혀가 왕의 배를 덮었다고 해석하지만, 원문을 보면 왕의 혀라야 맞다. 배를 덮을 정도로 길고 넓은 혀는 한자로 하면 장광설(長廣舌)이다. 그런데 이 장광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남다른 32가지 신체적 특징 중의 하나다. 부처님의 혀는 얇고도 부드러워 길게 내밀면 얼굴을 감싸고, 혀끝은 귀털의 가장자리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길고 넓은 혀는 뛰어난 지혜, 대단한 웅변의 상징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냇물 소리 그대로 장광설이니, 산빛 어이 청정한 몸이 아니랴(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이다.
경문왕이 장광설의 소유자였다는 말은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지혜자였다는 뜻일까? 그런데 그는 자신을 지켜주는 세력이 곁에 있을 때만 그 혀를 내밀었다. 아직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 보일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뱀 떼는? 왕실의 기반이 취약한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밖에서 데려온 호위 세력들이었을 게다. 자신이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거느렸던 화랑도였을 터. '삼국유사'에서 뱀은 늘 왕권을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복두쟁이가 외친 뒤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수군대는 대숲에서 대나무를 베어냈다. 대신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산수유나무를 심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러자 숲은 우리 임금님은 귀가 길다고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당나귀 귀는 우스꽝스럽지만 긴 귀는 귀인의 상이 아닌가? 비등하던 악의적 여론을 세력 교체로 교묘하게 잠재운 것이다.
높은 지혜를 나타내는 장광설이 어느 때부터인지 끝도 없이 말만 많은 수다의 뜻으로 변했다. 선거철을 맞아 주변이 온통 시끄럽다. 너나없이 말이 많지만 건질 말이 없다. 함부로 멋대로 무책임하게 떠드는 말은 장광설이 아니다. 다변(多辯)과 요설(饒舌)은 저만치 던져두고, 지혜로 빛나는 거침없는 장광설을 듣고 싶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