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3년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갈 때 일이다. 큰 내를 건너며 중인과 역관들이 맨발로 담여를 멨다. 역관들이 중국말로 투덜댔다. "지위가 낮은 이런 녀석까지 우리가 메야 하다니 죽겠구먼." 연경에 도착해서 중국 관원과 문답할 때, 오리가 역관 없이 유창한 중국어로 대화했다. 역관들이 대경실색했다.
그의 집은 어의동(於義洞)과 대동(臺洞) 사이에 있었다. 채벌이 금지된 소나무를 베던 소년이 산지기에게 붙들렸다. 근처 허름한 집 마당에 늙은이가 해진 옷을 입고 앉아 자리를 짜고 있었다. "여보, 영감! 내일 끌고 갈 테니 이 아이를 잘 붙들어 두오. 놓쳤다간 되우 경을 칠 줄 아오." 산지기가 가고 아이가 울었다. "왜 안가고 거기 있니?" "제가 달아나면 할아버지가 혼나잖아요?" "나는 일없다. 어서 가거라." 이튿날 산지기가 와서 아이를 내놓으라고 야료를 부리다가, 의정부 하인에게 혼이 나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영의정이었다.
그는 수십년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험난한 국사를 원만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해 모든 이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막상 그는 턱이 뾰족하고 콧날이 불그레하며, 주근깨가 많은 볼품없는 외모였다. 다산은 그의 화상(畵像)에다 이런 찬(贊)을 남겼다. "사직의 안위가 공에게 달렸고, 백성은 공 때문에 살지고 수척해졌다. 외적이 공을 인해 진퇴가 결정되고, 기강이 공을 통해 무너지고 정돈되었다."
84세 때 인조가 승지를 보내 위문했다. 그 거처에 대해 묻자, "띠집이 낡아 비바람도 못 가릴 지경입니다"라는 대답이었다. "재상 40년에 몇 칸 모옥뿐이란 말인가?" 모든 이가 그 청렴함을 보고 느끼라는 뜻으로 나라에서 직접 집을 지어 주었다. 이 집이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의 관감당(觀感堂)이다.
영남 사람들이 이원익과 유성룡을 비교해서 말했다. "오리는 속일 수 있지만 차마 못 속이고, 서애는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그는 더도 덜도 말고 꼭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좌우명은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견주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한다'였다. 그의 수많은 일화에는 모든 이의 한결같은 존경이 담겨 있다. 오늘에는 어째서 이런 큰 어른을 찾기가 힘든가.//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