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元曉·617~686) 스님이 지은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의 8~10세기 필사본이 중국 둔황 고문서에서 마침내 출현했다는 소식이다. 1696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판본보다 최소 700년 이상 앞선다.
중국의 '송고승전(宋高僧傳)' 중 '원효전'에는 원효가 '금강삼매경소'를 짓자, 그 축약본이 중국으로 건너가 널리 읽혔다고 적혀 있다. 현장(玄奘) 법사의 오류를 지적한 원효의 상위결정비량(相偉決定比量) 논의가 당나라에 알려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원효가 있는 동쪽을 향해 세 번 절하며 존중하여 찬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 승려 장준(藏俊·1104~1180)의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보인다.
원효의 손자인 대판관 설중업(薛仲業)이 780년에 신라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 일이다. 그곳의 상재(上宰)가 원효 거사가 저술한 '금강삼매경론'을 읽어보고, 생전에 만나지 못한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는데, 그 손자를 만나 기쁘다며 시를 지어 주었다. '삼국사기' '설총전'에 나온다.
원효는 당대뿐 아니라 사후에 이미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셈이다. 금번 둔황 고문서의 발견으로 그 실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원효는 상주의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었다. '삼국유사'는 '당(幢)'이 '털[毛]'이라 했으니, 그의 아명은 우리말로 '새털'이었던 셈이다. 어머니가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급작스레 산기를 느껴 새털옷(裟羅)을 나무에 걸어 가리고 그를 낳았대서 지은 이름이다.
그의 이름 원효(元曉)는 신라말로는 시단(始旦), 즉 '새 아침' 또는 '첫새벽'이란 뜻이라고 '삼국유사'는 적고 있다. 일본에서 1659년에 간행된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끝에 찬자의 이름으로 적혀 있는 '새부(塞部)'가 바로 당시 신라 말 '새벽'의 표기임은 진작에 불교학자 김영태 선생께서 명쾌하게 밝힌 바 있다. 당시 원효는 신라 사람들에게 '새벽' 스님으로 불렸던 것이다.
부처님 땅(佛地村)에 새털처럼 가볍게 새벽 스님이 태어나 그곳에 처음 열린 절(初開寺)을 세웠다. 그리고 그 빛이 중국·일본 등 동양 삼국에 찬연히 빛났다. 인도와 중국의 고승들도 해결 못한 난제를 국내파인 새벽 스님이 단번에 격파해버렸다. 통쾌하지 않은가?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