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묵장(書巢墨莊)
송나라 때 육유(陸游)가 자기 서재를 서소(書巢), 즉 책둥지로 불렀다. 어떤 손님이 와서 물었다. "아니 멀쩡한 집에 살면서 둥지라니 웬 말입니까?" 육유가 대답했다. "당신이 내 방에 들어와 보지 못해서 그럴게요. 내 방에는 책이 책궤에 담겼거나 눈앞에 쌓였고 또 책상 위에 가득 얹혀 있어 온통 책뿐이라오. 내가 일상의 기거는 물론 아파 신음하거나 근심·한탄하는 속에서도 책과는 떨어져 본 적이 없소. 손님도 안 오고 처자는 아예 얼씬도 않지. 바깥에서 천둥 번개가 쳐도 모른다네. 간혹 일어나려면 어지러이 쌓인 책이 에워싸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소. 그러니 서소라 할밖에. 내 직접 보여드리리다." 손님을 끌고 서소로 가니 처음엔 들어갈 수가 없었고, 들어간 뒤에는 나올 수가 없었다. 손님이 껄껄 웃고는 "책둥지가 맞소" 하며 수긍했다. 육유의 '서소기(書巢記)'에 보인다.
오대(五代)의 맹경익(孟景翌)은 일생 책만 읽었다. 문을 나설 때는 책 실은 수레를 따라오게 하면서 종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서재를 서굴(書窟), 즉 책동굴이라고 말했다. 노나라 사람 조평(曹平)도 집에 책이 많았는데 없어질까 걱정해 돌을 쌓아 창고를 만들어서 책을 보관했다. 세상에서 이를 조씨의 서창(書倉) 곧 책창고라고 불렀다.
송나라 때 유식(劉式)이 세상을 뜨자 그 아내가 남편이 읽던 책 1000여 권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아들들에게 말했다. "이것을 네 아버지는 묵장(墨莊)이라고 했다. 이제 너희에게 배움을 증식시키는 도구로 준다." 묵장은 먹글씨로 이루어진 집이란 의미다. 서책은 그 자체로 집 한 채이다. 청나라 때 이정원(李鼎元)과 호승공(胡承珙) 등도 여기서 뜻을 취해 자기 호를 묵장이라 했다.
서재가 새 둥지나 짐승의 굴 같대서 서소와 서굴이다. 책창고와 먹물로 지었대서 서창과 묵장이다. 책 속에 묻혀 그들은 부지런히 읽고 또 읽어 큰 학자가 되었다. 남들 하는 걱정 다 하고 남 놀 때 놀면서 이룰 수 있는 큰일은 어디에도 없다. 공부는 단순 무식해야 한다. 문밖의 천둥 번개 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한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