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卽事즉사
慣病渾忘病(관병혼망병) 병에젖어서 병든 줄을 까맣게 잊고 長閑却厭閑(장한각염한) 늘 한가해서 한가함이 되레 싫구나. 補階臨淨綠(보계임정록) 계단을 고쳐 맑고 푸른 물을 내려다보고 刊樹露孱顔(간수노잔안) 나뭇가지 잘라내어 산봉우리 드러낸다. 灌竹晨仍夕(관죽신잉석) 대나무에 물을 주며 아침저녁 다 보내고 尋雲往復還(심운왕부환) 구름을 뒤쫓아서 갔다가는 돌아온다. 淸宵更無事(청소갱무사) 밤이 되면 할 일이 더는 없기에 邀月倚松關(요월의송관) 달을 마중하러 사립문에 기대선다. 조선 중기의 저명한 문신이자 학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 ~1633)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긴 병을 앓다보니 무료하고 심심하여 못 견디겠다. 그래서 병자라는 것도 잊고 소일거리를 찾아본다. 계단을 고쳐 맑은 못도 내려다 보고, 무성한 가지를 쳐서 푸른 산도 후련하게 보이게 한다. 대나무에 물을 준다고 괜히 아침저녁 오락가락하고, 흰 구름을 찾아 산 아래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낮에는 그럭저럭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문제는 밤이다. 더는 일할 거리가 없어 달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문밖을 나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 것만 같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