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54.140822 두 계명을 분명히 하자
.
.
.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
.
.
“흑과 백은 절대 상반의 두 개의 원색이다. (중략)
그래서 이 두 원색은 어떠한 경우에도
혼동이나 착란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기에 옛날에서 현재까지 뚜렷한 대조를
표시해야 할 경우에 항상 흑백을 이용한다. (중략)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러한 색상 감각의
표준 의식이 흐려졌거나 삐뚤어져 버린 것 같다.
번연히 흰 것을 검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옻빛같이 검은 것을 눈빛같이 희다고 억지 쓰는 친구들도 있다.”
<장우성 화백의 수필집『월전수상』에는 ‘흑과 백’>
.
.
. 수묵화의 세계와는 달리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려운 상황들을 자주 만난답니다.
.
판단을 해야 할 때
섣불리 자신의 직관에 의지하기보다는
찬찬히 관찰하고 경청하는 태도와,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자세가
인생의 지혜이자 현대 사회가
조화롭게 유지되는 조건이랍니다.
. 이처럼 인생사는 오히려
마치 경계를 꼭 집어 말할 수 없도록
미묘하게 색이 변해 가는
‘수채화’의 세계처럼 보인답니다.
.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지혜’가
구체적 상황에 적용되려면
역설적으로 그 중심에 근본적 원리에 대한
분명하고 타협 없는 확신이 있어야 한답니다.
.
그렇지 않다면
‘흑백 논리’로 삶의 복잡다단함을
재단하지 않는 관용의 태도는
섬세하고 호의적인 배려가 아니라
무책임한 상대주의나
자기 위주의 주관주의로 귀착될 뿐이랍니다.
. 어떤 경우에도
흑이 백이 될 수 없는 ‘수묵화’의 세계처럼
우리에게도
삶의 최종 가치에 대한 양보 없는
결단이 있어야 한답니다.
.
.
.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투신이(전부)랍니다.
.
이 ‘원리’에는
어떠한 모호함도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
이러한
두 가지 계명의 분명한 요구가
다양한 삶의
아름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수묵화’의 은은한 운치를
느끼며 깨달을 수 있답니다.
.
.
.
두 가지 계명을
분명히 해야 한답니다.
.
나는?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