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치는 날
비가 갠 이튿날
우물을 치려고
어른들은 머리를 감아 빗고 흰옷을 갈아입었다.
신발도 빨아 신었다.
손 없다는 날
마을은 개도 안 짖고
하늘이 어디로 다 가서 텅 비었다.
늬들 누렁 코도 부스럼도 쌍다래끼도 우물 땜시 다 벗었니라던
할매 말씀이 참말이라고
우리들은 턱을 누르고 믿었다.
울타리도 절구통도 살구나무도 언제 본 듯한 날
우물가엔 아래서 올라온 것들이 쌓였다.
삼대 부러진 것, 바가지, 실꾸리, 신발짝, 호미자루, 쇳대, 뼈다귀, 돌쩌귀, 이끼, 못, 흐레 쇠스랑날, 연필, 눈썹, 꿈동 텡 /정인섭
'겨레'는 같은 말을 쓴다는 의미일 테고 '식구'는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 그리고 '이웃'은 한 우물을 먹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우물이 있어서 마을이 생겼을 테니 그것은 한 마을의 심장과 같은 것이다. 마을 사람이 모두 모여 우물을 치는 행사가 있었다. '머리를 감아 빗고 흰옷을 갈아입는' 엄숙한 행사였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치우는 행사가 아니었겠나. '절구통'과 '살구나무'가 새롭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우물에 빠뜨린 눈물과 그리움은 또 얼마였던가. 시퍼런 하늘의 눈동자에 두레박을 떨어뜨리며 회한에 젖던 시절이 있었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