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錫汝壁 (꽃씨)
萬里携來春一囊 (만리휴래춘일낭)
만 리 넘어 가지고 온 한 주머니 봄소식
騷人輕橐爛生光 (소인경탁란생광)
시인의 가벼운 짐에는 생기의 빛이 찬란하네.
燕城蛺蝶魂應斷 (연성협접혼응단)
북경 성의 나비들은 넋이 온통 빠졌겠네.
失却東風幾斛香 (실각동풍기곡향)
동풍 불면 불어올 향내 몇 말이나 줄었을 테니.
/이정주(李廷柱)
19세기 여항(閭巷) 시인 몽관(夢觀) 이정주(李廷柱·1778~1853)의 작품이다. 친구가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다. 인사를 하러 친구 집을 들렀더니 짐 보따리에 들어있는 것은 꽃씨 한 주머니뿐. 가기 힘든 곳을 가서 남들처럼 고가의 사치품을 마구잡이로 가져오는 대신 꽃씨를 가져왔다. 저속한 사람이라면 바보라고 비웃겠지만 시인은 그의 무욕과 멋스러움을 그냥 넘길 수 없어 벽 위에 시를 써놓고 왔다. 만 리 길 되돌아온 친구의 가벼운 짐 보따리에서는 생기가 넘쳐흐른다. 봄꽃을 피울 꽃씨가 가득 들어 있어 그 광채가 벌써 느껴진다. 봄바람이 불면 북경에서는 꽃향기가 많이 사라져 나비들은 넋이 빠질 만큼 슬픔에 잠기리라. 대신 조선 땅 한양의 나비들은 꽃향기에 취해 훨훨 날겠지. 온 마을을 꽃향기로 채운 친구야말로 진정한 부자요 사치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안대회 :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그림:정인성/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