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마당가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기 좋은 시절이다. 보랏빛 오동꽃은 담장 위에 그늘을 드리운 커다란 잎들 사이사이 피어 있다. 담장은 오동나무 그늘 속에서 영화관의 화면처럼 먼 지난 일들을 '아슴아슴' 상영한다. 지난 일들의 반추, 그 속에 어찌 후회가 없으랴. 노한 일, 하여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 돌이켜 사과하고 용서받고 싶으나 돌이킬 수 없다. 이미 그 사람, 이승에 없다. 무슨 큰 죄(罪)가 되었을까만 못내 마음이 아픈, 함부로 노한 일!
기러기 왔다가듯 너무 일찍 세상을 하직한 누이는 어쩌면 오동꽃으로 다시 왔을지 모른다. 이 오동나무, 혹 딸을 낳으면 심었다는 오래된, 아름다운 풍습대로의 그 나무는 아니었을까? 어느덧 꽃도 하나씩 발등에 떨어지고 심정에 쿵쿵 울리는 낙화(落花)는 안으로만 소리치는 우레다. 오동꽃이 지는 자리에서 천둥 같은 뉘우침을 얻는 자, 천국에 갔으리.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