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25,140103 삶의 가치를 찾자 . . .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 . . ‘희망’이라는 두 글자는 참으로 큰 뜻을 담은 낱말이랍니다. .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움켜쥔 그 무엇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이만이 희망이라는 말을 뜻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 참된 희망은 현재의 욕망을 키워 미래를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이 아니랍니다. . 현재 이루지 못한 세속적 염원을 투사시킨 장밋빛 약속에 기웃거리는 것은, 그저 자신의 마음을 허황된 바람으로 채우고 소진시키며, 마침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게 한답니다. . . . 반골 기질이 넘쳤던 20세기의 뛰어난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이러한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답니다. .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중세의 그리스도교 철학은 희망을 거스르는 두 가지 죄를 지적하곤 하였답니다. . 하나는 슬픔에 지쳐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가치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하느님 나라에 관심을 갖지 앉는 타산적이고 오만한 자세랍니다. . . . 하느님의 자녀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희망을 지닌 이들이랍니다. .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순결한 마음은 희망하는 마음이랍니다. . 이러한 마음을 지닌 신앙인은 이 세상의 가치로만 삶을 가늠하지 않는답니다. . 오히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걸어가신 모범에서 자신의 인생길을 새로이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답니다. . . . 우리의 인생길을 새로이 발견해야 한답니다. . 나는? 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