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교훈, 무언의 교육, 모두 우리 집의 전통인 듯, 말씀 없이 일은 잘도 추려지고 척척 들어맞게 마무리 진다.
내가 없는 사이에 어른들이 말씀을 나누는지는 모르겠으나 말씀이 없어도 나 또한 눈치껏 잘도 해왔다.
내가 스스로 터득한 것 중의 하나는 새 동생들을 볼 때 여동생이나 남동생이냐를 나 스스로 알아내는 방법이다.
우리 고장에서는 ‘금줄’이라고 하지 않고 ‘송침’이라고 해서, 아기의 안전을 보장받는 통행금지 표지를 처마 밑에 매달아서 외부에 알린다.
어느 날의 ‘송침’은 소나무의 가지인 것을 보고 여동생임을 알고, 몇 해 뒤에 어린 소나무가 통째로 매달려 있으면 남동생임도 안다. 느낌으로 홀로 알아차리는 셈이다.
이 ‘송침’크기 조절은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이 외부와의 약속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온전히 아버지의 기분 여하에 따라서 되는, 우리 집만의 규칙인 듯하다. 집안에 흐르는 감정의 폭이 넓어서 나를 이해시키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행하게도 작은 솔을 달았던 모든 여형제는 세상을 이미 떠났다는 간접적인 소식을 듣고 보면, ‘송침’이 갖는 어떤 상징적 징후를 관련짓고 싶은 괴이한 생각마저 든다.
‘송침’은 클수록 좋은 것인가 아니면 작아도 그 집안 대주의 의사와 뜻이면 족한 것인가. 크거나 작거나 소나무이면 되는 것일까.
‘송침’의 크기와 인명이 상관되는지, 이런 걸 아는 것은 조물주의 소관일 성싶다. 우리 집의 경우는 우연일 것이라는 생각을 억지로 해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났을 때 얼마나 큰 ‘송침’을 달았는지도 알고 싶다. 이만큼 사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송침’을 아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도 없으니 이 또한 조물주의 몫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