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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통넋두리 2008. 7. 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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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말로 이어지고 말이 또 글로 이어졌고 글이 다시 영상으로, 이 영상은 오감으로 스며들어 끝내는 한 바퀴 돌아온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의 의사전달 수단이 어떻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우리도 초기에는 분명히 몸짓과 노래로 의사를 소통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딴판으로 돼서 눈빛과 손짓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의사를 소통하게도 됐다.

사람의 감정이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수만 있다면, 표현 수단도 간단해질 것이고 따라서 의사소통 과정에서 오해나 시비의 소지가 없어질 것이 당연하다. 해서 매개 수단이랄 수 있는 글이 한결 단순해질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든지 같은 책을 읽고서 느끼는 감도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타내고자 하는 의사나 감정을 정확히 기계적으로 나타냈다면 읽는 쪽도 기계적으로 받아들여서 쓴 이와 읽는 이가 똑같은 감정변화를 갖고 반응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그래야 완벽하다. 하나 지금의 우리 감정 깊이와 비교해서 글이나 말은 턱없이 못 미치는 것에 대해 하소연하는 말을 누구나 들을 수 있다. 말을 하다가 하늘을 본다든지 가슴을 친다든지 손짓과 발짓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온전히 자기의 감정을 완벽하게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글이란 활자의 읽기 발음 약속에 불과하고 감정은 약속이 되지 않고 있다. 동사나 명사도 예외일 수 없지만, 수식어와 형용사나 부사 등은 말하고자 하는 이의 감정이 어느 정도로 표현되는지 알 길이 없다. ‘슬프다’가 어느 정도 슬픈지 ‘슬프다’ 앞에 아무리 길게 늘어놓아도 읽는 사람에게는 쓴 사람의 감정을 정확히 전달해 주지 못한다. 이 점은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예술성을 갖는 감정 표현이라 할지라도 쓴 이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긴 그렇게 완벽한 표현 수단이 있고 전달받는 수단이 있다면 예술이라는 의미의 근원이 무시 될 테니까 오히려 완벽한 의사전달 수단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쪽이 깊이와 폭이 넓어지고, 사는 멋과 맛을 더해서, 우리의 삶이 풍부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딴은 그렇다. 하지만 나같이 무딘 감정을 가진 사람이 사려 깊은 사람을 활자화한 의사를 그대로 느끼지 못함은 퍽 억울한 일이요 손해 보는 일 같아서 넋두리한다.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글은 지극히 제한적인 의사의 소통 수단이니 이를 좀 더 다른 표현 방법으로 하면 어떨까 싶어서 넋두리를 잇는다.

가령 ‘슬프다’는 말의 극 상한점(極上限點)을 십(10)으로, 슬픔이 오기 직전 감정을 원점(原點)을 영(0)으로 표현해서 글쓴이가 ‘십(10) 슬프다’고 썼다면 우리의 마음이 ‘슬퍼서’ 죽음까지 갈 지경에 놓인 걸로 전달받는다면 비교적 바르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슬픔을 겪는 사람의 슬픔은 겪지 않은 사람이 간접으로 체험함으로써 얻는 슬픔에 비하여 훨씬 더할 것으로 생각하면 이 또한 완벽해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넋두리이다. 이 넋두리를 사설로 늘어놓는 유가 있다. 또 내 어렸을 때가 나와야만 과연 그럴 만도 하겠다고 하고 여길 것이다. 그때 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나 또한 불만을 안고 어설프나마 이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중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다. 삼 년간의 이차 대전 와중에 전쟁물자만 생산했으니 생필품은 구하기가 어려운 터에 하물며 해방과 함께 닥친 각 분야의 질서가 마비된, 교과서도 노트도 연필도 깡그리 없는 상태에서, 그래도 시작은 하는 것이니 오죽하랴.

명색이 영어를 공부한다면서 단어를 적어 넣는 공책인 손바닥만 한 단어장이 전부다. 시간마다 흑판에 쓴 본문을 베껴 써야 하고 쓰는 노트도 각인각색의 것이다. 마분지로부터 창호지에 이르기까지 크기와 두께가 다르고, 겹으로 된 것과 홑으로 된 것, 과히 수공예의 전시장이 된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영한사전이 있을 수 없다. 우리 반에 겨우 둘인가가 영일(英日)사전을 갖고 있을 뿐이다. 자. 그런데 머리가 나쁜 내가 배우는 낱말을 모조리 기억할 수 없는 한계에 점점 가까워지자 잊어버린 단어를 기억해낸다는 것, 시간의 낭비고 정력의 낭비였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모조리 들추자니 이 역시 시간 낭비다. 그럴 때 사전이 있어야 하겠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때로 찾아낸 단어장의 풀이도 아무리 꿰맞추어도 말이 이어지지 않아서 속상한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담아내는 풀이가 되어서 한없이 벌어지는 낱말의 의미를 다 이해하고 따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생각이 지금까지 내 뇌리에서 맴돌고 떠나지 않는지 알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한 낱말을 써놓고 몇 가지씩의 풀이를 하고 그 풀이를 하는 나라의 말의 뜻이 또 몇 가지씩 풀이된다면 벌어지는 범위는, 가령 양쪽 말 모두 세 가지씩 풀이된다고 할 때 27가지(3*3*3=27) 이상이 된다는 것인, 즉, 우리 같은 둔 자가 거기서 무엇을 가려서 말을 만들어 볼 것인가. 답답하고 기가 막혀서 그만 흥미를 잃고 마는 것이다. 용한 것은 그래도 당장 필요한 것부터 풀어서 반복해서 익혀나간다면 되는 것으로나마 안 때였다.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터득하고 나서 조금은 덜 짜증스러웠다.

이토록 우리 인간의 말과 글이 완전하지 못하다. 개개인의 감정, 서로 다른 민족 간의 이해, 국가 간의 갈등을 총체적으로 일치시키는 말과 글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일까. 만약 이런 표현 수단이 단순화되도록 우리의 지능이 퇴보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세계의 평화는 영구화될 것이다. 그러면 인류는 불행할 것인가? 모름지기 더 행복할 것으로 믿고 싶다. 왜, 의사전달 수단이 미숙하면 할수록 자연에 순응하고 더불어 살면서 생을 누리는 것을 우리가 보고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쪽으로 말한다면 각 나라말의 사전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이것과 정 비례하여서 쌓이고, 깊어지리라고 믿어진다. 즉 사전의 두께가 얇을수록 갈등 구조가 단순하고 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전은 우리 인간의 의사소통 수단을 늘릴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자꾸 줄여서 급기야는 한 낱말에 한 가지 뜻만을 그것도 수치적인 감정표현구단을 넣어서 줄여나가야 한다. 그러면 인간은 낙원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내 어렸을 때의 괴로움이 쌓여서 이런 오만한 생각까지 품게 했으니 내 삶의 조각을 말로써 토해내는 작은 꼬투리가 되어서 지금은 오히려 즐겁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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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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