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튼소리

외통프리즘 2021. 9. 9.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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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소리



9323.210909 허튼소리

어영부영 미수(米壽)라던 여든여덟을 먹어 치우고 졸수(卒壽)라는 아흔이 코앞에 놓이니 그냥 넘길 수가 없어 뇐다.

밥주걱을 쥔 채 밥통을 등 뒤로하고 서서 다음 해야 할 짓을 못 찾아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서 고개를 저으며 한숨 짓고 나서야 밥통 뚜껑을 여는 이즈음이다. 하지만 생각의 끈만은 끊어지지 않으니 영장(靈長)의 체면을 흘릴 수 없는 터, 그래서 나를 다잡는 말꼭지가 된다.

누구나 자기 방식을 굳혀 편한 마음으로 한 생을 살 것인데, 돌덩이가 아닌 난들 어찌 나름의 삶의 길이 없겠는가 싶어 일직이 조금씩 익혀 다져왔다.

이제 그 방법이 옳고 그름은 의학에서나 가늠되겠다. 하지만 그 의술 또한 사람이 삼가며 사리는 일이니 인간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겨서, 또 마냥 내 고개는 쳐들리는 것이다.

# 애꾸눈으로 살핀다.

자기 삶을 짐승보다 못하게 마감한다는 것, 곧 고통과 번민 속에 살다 죽음을 맞는다는 것, 이 생각이 내가 감당키 어려운 그 하나다. 달리, 고고하게 살다 가지 못하고 질질 끌려 연명함이 과연 영장의 삶인가? 왜 자기 목숨을 스스로 이어가지 못하고 남의 도움으로 연명해야 하는가? 정신계가 인간 외의 생물보다 낫기 때문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 함몰하는가?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나 또한 예서 예외가 될 수 없으면서도 뇌까리고 싶다.

밝혀보자. 인간 이외의 생물은 도태의 과정으로 몰락하거나 타종 또는 동종의 공격으로 사멸될 때까지는 자기 처지에 놓인 환경에서 자기 의지대로 살다 간다고 본다. 그런데 인간은 서로를 위한다면서 의미 없는 연명을 장려하거나 권장한다. 그리고 그 뜻을 받아들인다.

나를 정상 의식상태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나로서는 이점이 그저 못마땅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물건이 아니고 자유의지로 살도록 지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부, 존비속, 친족, 동기간은 말할 나위 없고 모든 이가 정을 못 끊어 붙들고 늘어진다고 보면 충분한 이해가 된다. 그러면 생을 마감하는 당사자보다 밖의 사람이 더 소망하는 본위로 남(개체 존엄)의 고통을 외면하는 꼴이 되어도 인륜에 합당하다고 해야 하는가? 고개가 저어진다.

제정신일 때 자기 생의 마지막을 스스로 확정하는(이즈음 일어나는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삶이 되어야 마땅하리라.

#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의 증상

젊었을 때 이런저런 병치레는 달리 살펴보겠기에 접고, 40줄을 지내던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소스라쳤다. 그동안 무심히 지냈는데 그날따라 한가한 날이었던지, 내 등이 구부정해 보였다. 놀랍다. 그래! 내가 나를 고치마. 다잡고 쏜살같이 ‘동대문 운동장’에 가서 줄 넘기 줄, 아령, 완력(?가슴 펴는 기기)기, 악력(握力)기를 사다가 그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르게 이용했다. ‘달밤에 체조’한다는 놀림이 있거나 말거나 꼭두새벽부터 별을 세며 뛰었다. 한 해 못 가서 줄넘기 바닥 끈이 몇 개나 닳아 떨어지고, 완력(?腕力)기의 용수철이 닳아빠졌다. 모두 그때마다 새것으로 마련해 운동을 이어갔다.

이는 주어진 대로 살라는 가르침을 깨친 데서 비롯됐다. 곧 쓰지 않는 근육은 퇴화할 수밖에 없는 ‘본연의 구조’ 그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늙은이라는 명패가 붙기 시작하는 나이, 곧 65세부터 일어나는 퇴행증상을 어찌 견디는지를 신체 외모의 윗부분부터 차례대로 펴놓자.

# 육체의 외형에서

머리칼은 왜 한없이 자랄까?

모름지기 이 또한 인간의 원시적 활동 영역에서 찾는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열이나 겨울날 냉기에서 어깨 피부를 보호 유지하기 위해서 자라는 것이리라. 문명(진)화되었다고 하지만 자연은 아직 이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니그로’의 머리는 왜 곱슬곱슬하게 나서 늘어지지 않는가? 그들은 북반구 지역과 달리 한 낮에 밖에 나갈 수 없을 만치 뜨거운 햇볕이라 머리카락이 길 이유가 없어서일 거라고 짐작한다.

이렇게 보아 언젠가는 생활환경 변화로 긴 머리를 가진 사람이나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이나 함께 거웃처럼 짧아지거나 없어지리라. 순(동)화, 내지 진화(창조)하면서 그리되리라.

나는 아직 세속의 틀을 벗지 못하고, 뜻을 거스르는 줄 알면서 그냥 남들 하는 대로 단발(短髮)하며 따라간다. 응석으로 이 한 생을 건너려 하니 응보의 그때가 두렵다. 단지 빠지는 머리칼만이라도 그대로 지켜보면서 본연(조물주)의 그 뜻을 날마다 새긴다.

같은 털인데 눈썹은 왜 자라나지 않으며 눈 위에 자라 있을까?

아마 눈썹이 없다면 빗물이 거침없이 눈으로 흘러 들어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서서 걷는, 사람 처지에서는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달리, 서로 바라보는 맞은편 사람이 느끼는 상대 얼굴의 균형감이나 조화로움, 아름다움은 그저 오랫동안 보아온 우리의 감각적 표준이 된 까닭일 뿐이리라. 나를 바라보는 이의 감각이 내 생존의 조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겨진다. 사회적 환경의 순기능은 눈썹과는 상관이 없을 성싶다.

그러니 오로지 감사할 뿐이다. 창조의 뜻에 합당하게 눈썹을 있는 그대로 생의 끝날까지 보존하리라. 다듬지도 않고, 흰 눈썹으로 된들 그대로 반기리라.

눈은 왜 깜박여야 하는가?

모름지기 안막(眼膜)에 체액을 발라서 망막(網膜)에 제대로 피사체가 투영되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왜 눈꺼풀 털이 한 줄로 나란히 위 눈꺼풀엔 길게, 아래는 짧게 나는가? 눈 안에 검불이나 벌레 침입의 방패. 곧 문지기 역할일 것이다. 그러니 머리카락처럼 길 까닭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즈음 새로운 체험을 하고 있다. 왼쪽 눈이 불편해서 안과에 들렀더니 나이가 많아 ‘아랫눈꺼풀이 늘어져 두드러지면서 속눈썹이 말려들어 눈에 닿아 불편합니다’며 족집게로 하나하나 뽑아냈다. 그러고 한 달간을 견디었는데 또 그 눈에 무엇이 들어간 것같이(異物感) 불편해서 다시 그 안과에 갔더니 ‘뽑은 속눈썹 자리에서 다시 나 자라서 그렇다'며 또 뽑는다. 이렇게 매달 ‘치료의 덕(?)’으로 정상 생활을 하면서 2년을 다녔다. 그런데 ’코로나19 극성시기에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없는 기간을 몇 달 지나고 나니 그런 증상이 말끔히 사라졌다. 속눈썹과 눈알이 서로 자리를 잡아 서로 제 기능을 하는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그러니 인체의 어느 부분이건 일시적 이상이 있어도 불편을 참아내며 상당 기간 지나면 그 불편이 해소되는, 자연치유의 이치를 오늘에 또다시 깨치는 것이다. 이 또한 조물주의 놀라운 섭리다. 숙연할 따름이다.

귀는 왜 귓구멍에 털이 없고 귀지만 생길까?

귓바퀴이야 음파를 받는 안테나 역할일 것이니 당연히 털이 없어야 하겠지만 귓구멍엔 벌레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털이 있어야 할 터인데 없다. 달리 역한 냄새를 풍기는 귀지가 있으므로 벌레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귓구멍에 털이 있다면 그 진동에 다른 소리를 옳게 들을 수 없기에 그렇게 진화, 지어진 것이리라.

귀지는 내 몸의 보호 약으로 여겨 기꺼이 감내하며 후벼내지 않으리라. 언제부턴가 귓바퀴에 손바닥을 붙여 소리를 듣는 버릇이 생기더니만 이즈음은 그 짓도 소용이 없다. 소리는 확연하게 들리는 데 그 소리의 음가(音價)를 구분할 수가 없어 되묻고 되묻는 처지로 되었다. 보청기를 하라는 애들의 권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한 생을 살면서 겪어야 하는 나만의 특권(?)인데 이 체험을 마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귀에는 털이 없는데 콧구멍에는 왜 털이 있나?

잡티나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어졌으리라. 그래서 그 기능에 걸맞게 자랄 뿐, 머리카락처럼 길어지지 않는 것이리라. 공기 중의 검불과 미세먼지를 털로 막고 콧물로 적셔 내므로 맑은 공기만을 들여 마시기 위해 그리 지어냈고. 또한 냄새를 제대로 가려서 생존에 필요한 것의 취사선택이 제대로 되도록 지어냈으리라.

그러나 나는 세속적 기준에 안주하여 자주 코털을 다듬으니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는, 아직은 먼, 내 탓 죄인이다.

입 안에는 털이 없다. 왜?

입은 음식물을 담아 들이고 씹어 삼키기 위해서 가로 놓였고, 음식의 맛과 씹는 과정의 혼잡을 없애기 위해서 털이 없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니 맛으로 섭취하도록 지어졌으리라. 음식물의 맛은 세 치 혀와 입속에서만 그 맛을 알 뿐 뱃속에서는 모두 한낱 맛없는 영양소(營養素)일 뿐이리라. 똥 원료인데 오직 입안에서만 맛을 느끼며 삼킨다. 그래야 생이 이어지니까! 오묘한 아치의 지음이다. 또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입 안으로 음식물 아닌 잡것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콧수염이 늘 자라면서 문지기 노릇을 한다고 본다.

지은이의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

그 러면 턱수염은?

입 보호용일 테다. 입은 생명 유지를 위한 우리 몸 중의 가장 중요한 문이니 여느 부위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입 아래위에 털이 빽빽하다. 몸통과 머리의 중간인 목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도 이 콧수염과 턱수염이 하리라.

이곳 또한 생긴 대로 가꾸지 못하고 세속을 쫓아 머리칼과 함께 콧수염, 턱수염을 자르고 다듬으니 알면서 거역하는 나를 되돌아본다. 지은 이의 사랑으로 덮어질 것이라며 마냥 응석일 뿐이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으니 바로 여성에게는 수염이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수염이 없다! 그대로 내 생각대로면 여자는 생존조건에서 무방비상태인데 그럴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다. 여성에게 수염이 없는 이유는 생태적인 조건 즉 어떤 신체적 조건(여성호르몬) 에 의해서 남성과 다른 생리적 영향이라고만 여기면 사람을 지어낸 절대자의 뜻을 대변할 수 있는 이치에 부합하지 않으니 이 부분은 무엇인가 숨겨진 신비인데 풀어내는 곳을 찾아낼 길이 없다. 그러면 여자는 소멸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남녀를 있게 한 그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염은 생존을 위한 신체 보호용이 아니라 남녀 성을 구별하는 지은이 사랑의 결과물로 되돌아가는 내 사유(思惟)의 잘못이 드러나고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웃음거리가 될 대목이다.

입술은?

입 안에 들어간 음식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도록, 의사소통을 위한 말을 지어내기 위함이리라. 그러므로 입은 다물고 있어야 온전할 것이다.

이(齒牙)는 왜 고르지 않을까?

채식과 육식을 할 수 있도록 안배되어 앞니는 뜯고 송곳니는 찢고 어금니는 갈아내는 분담일 것이다. 오랜 세월 흐른 뒤엔 또 달라지리라.

나, 이제 아랫니는 하나도 없다. 윗니는 양쪽 어금니 4개가 없다. 윗어금니 양쪽 1개씩은 젊은 한때 과로로 저절로 빠졌다. 그러나 다음 어금니 한 개씩은 의치를 달아내느라 갈고 다듬어서 몇 년 사이에 결국 달아낸 이와 함께 못쓰게 됐다. 이제 아랫니는 이렇게 의치를 하나씩 늘여 이어 만들다 보니 이 나이가 돼서는 남는 이가 하나도 없다.

또 돌이켜 본다. 혹 의치를 전혀 달지 않고 그냥 견디었다면 지금은 아랫니도 윗니처럼 양 어금니 두 개씩만 빠지고 나머지는 보존돼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모두 내가 지은이의 의지를 저버리고 현세적 기준으로 삶을 이어가다 보니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여긴다. 뉘보고 나무라랴.

목은 왜 전신에서 가장 적은 부피로 됐을까?

눈 귀 코의 기능을 최대한 늘리기 위한 회전축일 것이니 생존조건 최적화를 위해서였으리라. 해서 목운동은 잠시도 게을리할 수 없으리라. 또한 개척을 위한 전진과 사물 취득을 위한 배려이리라.

뜻을 새겨 목운동을 평생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금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하루 각 50번씩 목돌리기를 그치지 않는다.

팔은 생존을 위한 당연한 부분, 사지 중 한 부분일 터인데 왜 외마디가 아니고 여러 마디로 되었을까?

그야 마디가 많을수록 자유로울 테니 당연하다. 만약 팔에 마디(관절)가 없다면 우선 태내에서 성장이 어려울 것이고 나고 자라서는 목격한 취득 대상을 앞에 두고도 뒤로 물러서야 할 터이니 그 순간 취득 대상은 멀리 도망갈 것이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더듬이 노릇과 사물의 장악을 위해서 필수적이고 신경계로 이어진 촉수(觸手)로, 신체의 유지 관리의 첨병 역할을 하리라.

어깨를 위해 매일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30번 한다. 독거노인의 외로운 시련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으신 이의 뜻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 곧 마디의 기능을 잃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손은 왜 다섯 손가락일까?

많을수록 좋을 텐데. 쓰임새 편이(便易)일 것이리라. 그런데 손톱이 자라는 이유는? 아직 노동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리라.

해서 손놀림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시장보고 밥하고 청소하고 쓰레기 버리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 왜? 지어진 대로 움직이며 살아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때니까. 사는 날까지 내 힘으로 살아야 하니까!!

허리뼈는 왜 짧은 마디로 이어졌을까?

그야 목과 허리와 더불어 먹거리를 찾기 위해서나 사주(四周)를 경계하고 걸음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싶다.

해서 나는 부단히 움직인다. 서서 무릎을 굽히지 않고 손바닥이 바닥에 닿도록 매일 한 번씩 한다. 허리가 녹(?) 쓸지 않도록 적당히 허리뼈 마디의 이완을 이어가기 위해서. 안 해도 될 짓을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미친 사람처럼 한다. 왜? 마지막까지 내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

배는?

당연히 늘어지고 줄어짐으로 내장안에 들어온 음식의 양을 조절해야 하는 기능을 마다할 수 없었겠지.

모르긴 해도 짐승은 절대로 과식 안 할 것이다. 그들은 욕심이 없으니까. 오직 당장 만족으로 모든 것을 안아낸다. 다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하다.

체험 1.

어릴 때부터 식탐(食貪)했나 보다. 동네 산신제 때다. 집집이 나뉘는 고깃국을 타오도록 이르신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게 됐다. 아마 여섯 살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 이름이 크게 들리기에 뚝배기를 들고 가마솥 옆에 계신 아저씨에게 달려가서 그릇을 내밀었다. 그릇에는 국이 담기고 바로 옆 다른 어른이 함지에서 낸 쇠고기가 몇 점 담겼다. 국그릇을 받아든 나는 바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국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얼른 나뭇가지를 주어 누가 볼세라 고기 한 점을 건져 입에 넣고 입을 꼭 다물고 양손으로 든 국그릇만 보며 잰걸음으로 집으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영문을 모르니 의원을 부르며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배에 뜸이 뜨이고, 다시 의원 집으로 데려가고, 한동안 동네가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몰래 고기 먹은 못된 짓을 바른대로 털어놓았는지 기억이 없다. 모름지기 안 했을 것이다. 지금의 내 성정으로 봐서도 그랬을 것 같다.

지금도 그 뜸 자리를 보며 내 생을 가다듬어 간다. 절대로 탐내지 말자. 뇌고 뇌며 살아왔다. 그 이후로는 탐나는 게 없다. 순리대로 살려고만 했다. 그때 남이 보거나 말거나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짐승같이 그 자리에서 꼭꼭 씹어서 천천히 삼켰다면, 그래서 뒤탈이 없었을 것이다. 어린 나에게도 사람이라는 자존감이 있었는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몹시 되 집히는 대목이다. 지어진 뜻을 외면한 내 탓을 새긴다.

체험 2.

중년의 나이었다. 과식이었던지 배가 불편해서 약을 먹었으나 굶지는 않았다. 바로 이어가는 불편한 배를 다스리려 좋다는 양약을 식후에 빠짐없이 먹었는데 배는 편치 않았고 언제나 부글부글 끓었다. 회식을 회피하게 되면서도 굶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늘 외따로 죽그릇을 달고 사는 형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양약을 계속 복용하던 어느 때 아내의 권유로 한약을 먹게 되면서부터 양약을 끊었다. 한약도 첫 한 제만 먹고 끊었다. 약이라는 것 일체를 입에 대지 않기를 이어가니 그제야 배가 편하게 됐다.

음식을 넣어야 하는 위장에 음식 외의 이물질을 넣으니 배는 거부의 신호를 보내는 데 미련한 나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 일찍이 자연의 섭리를 깨치고 굶어서 다스리거나 음식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스스로 치유하는 이치를 알아 따랐더라면 오랜 기간을 고생하지 않았으리라는 뉘우침이 끊이지 않는다. 이 또한 지은이의 뜻을 망각한 결과였으리라.

체험 3

이후 84살이나 되도록 탈 없던 배에 이상징후가 있다. 배를 깔고 자며 뒤척이다가 화장실에 드나드는 일이 잦아졌다. 홀로 있으니 광고해 봤자 그렇고, 해서 종로 5가에 가서 전열 복대와 움직여서 열 내는 복대를 사다가 이용했는데도 효험은 없다. 급기야 굶고 먹기를 반복했다. 세끼를 굶으면 편안했다. 다시 먹으면 불편하고 설사를 했다. 이런 나날이 이어졌다.

몸이 쇠약해 결국 애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병원 신세를 면할 수가 없다. 곡절을 겪으며 온갖 종류의 검사 기구와 마련돼있는 검사방법을 죄다 거친다. 장 내시경을 하는 과정에 더는 진행 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장 내시경이 목적한 곳까지 다다를 수 없을 만치 대소장 상태가 안 좋았던지 3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이 마지막 세 번째였다. 검사를 위해 다량의 약물을 복용해야 하는데 먹은 약물을 토하는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병원은 온통 난리가 났다. 때는 양력 정원 초하루다. 검사 도중에 사망의 위험을 예견했던지, 비상 대책 필요를 느꼈던지, 아무튼 긴급소집된 의사들은 한밤중에 수술하게 됐나 보다. 나는 이미 죽음의 길을 감지하고 있었으니 평온했다.

대장 30cm를 잘라 냈단다. 한 달을 병원 신세를 졌다. 3 개월 후에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는 데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또 정기 검사도 해야 한단다. 이 또한 거부했다. 왜? 병에 대한 자료와 치료의 경과를 확인하는 절차는 당연히 응해야 함에도 거부하는 이유는 자명했다. 생사의 가름에서 나는 이미 노령의 나이를 인식했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주기적 검사를 외면한 채 암 종양 절제 후 한 번도 병원을 가지 않았다. 그러고 5년이 다 되어 간다.

엉덩이에는 왜 꼬리가 달리지 않았을까? 애초로부터 진화(창조)되면서 팔 쓰기가 자유롭게 되었을 테다. 그러면서 꼬리의 용도가 없어지게 되어 퇴화(退化)되었겠지. 여자는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해야 하니 골반이 당연히 크게 생성됐겠지.

엉덩이의 추억은 거의 없다. 아! 있다. 눈 오는 날 가까운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이 미끄러운데 몸 가눌 길이 없던 때다. 마침 버려진 골판지 박스가 보이길래 주어와 깔고 앉아 미끄러져 쉽게 내려온 기억뿐이다. 아직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진 적은 없다. 아마도 운동 덕을 보는가 보다. 곧 지어진 대로 사는 덕인가보다.

대퇴(골)근?

응당 몸을 지탱해야 하니 크고 장대해야 하리라.

무릎은 왜 뒤로만 굽혀질까?
그야 앞으로 굽어지면 달릴 수 없을 테고, 따라서 먹거리도 구하지 못할 테니까. 정강이 길이가 대퇴근(부) 길이와 비슷한 길이는 상체의 활동 유지를 위해 불가분의 관계였으리라.

이 무릎은 많은 체험을 했다. 한동안 아파도 지은 이의 의도를 헤아려 그냥 며칠 견디면 씻은 듯이 낫는다. 그러나 한 자리에 두어 시간 움직이지 않고 앉았다가 발걸음 옮기면 아프다. 무릅쓰고 10분쯤 걸으면 씻은 듯이 낫는다. 아마 내 몸 스스로 응급처치를 하지 않나 싶다. 모르긴 해도 이런 경우 병원에 의지한다면 그날 그 시간부터는 보행불능자가 되어 휠체어를 타게 되거나 지팡이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로지 지은이를 믿고 먹이를 입에 넣을 수 있는 날까지 움직임이 있어 그 시간까지 용납되는 것으로 자위할 뿐이다.

발꿈치는? 모름지기 강한 인대를 갖고 있을 터다. 왜?

온몸을 지탱하고 움직여야 하니까. 발꿈치는 우리 몸 중에서 가장 강인한 근육과 인대로 지어져 몸을 지탱(支撐)해 가는 가보다. 걸맞은 보호장구가 있어야 마땅한 데 없다. 발꿈치는 생명의 보존 수단임을 깨닫는다. 왜? 못 움직이면 먹거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가락은?

몸을 앞으로 밀어내기 위해 필수적이다. 발가락이 없다면 우리는 느림보를 면키 어려웠으리라.

엄지발가락과 다른 네 발가락이 같은 크기였으면 좋겠다는 욕심이지만 그 크기 모두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나름의 섭생(攝生)은 따로 없다. 아직 찾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지은 이의 사랑의 어느 한 방편임을 짐작할 뿐이다.

발톱은?

그야 발가락을 보호하고 힘을 더하여 달리도록 돕는 것이리라. 발톱이 몸의 활동으로 인해 닳아 유지되도록 지어졌는데 사람은 발을 보호한답시고 보호장구인 신을 신으니 발톱을 주기적으로 잘라 내야 하는 부담을 져야 하리라. 이 또한 인간 자기 의지로 개척한 환경 탓으로 여겨서 조물주에 응석을 부려 보는 것이다.

발바닥은?

여느 피부보다 두껍다. 아마 땅을 딛고 다니려면 지면의 여러 돌출 부분과 부닥치게 되어 내 몸이 이를 이겨내야 하는 부담 때문이리라.

신을 신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니 인지와 행동이 상반되어 세속화하는 내 입지는 허울뿐이다.

이즈음 회자(膾炙)되는 메디칼리제이션(medicalization)이 되지 않으려 무진 애쓰는 황혼 길이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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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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