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변白痴辨

외통프리즘 2019. 12. 3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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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변白痴辨

9321.191230 백치변白痴辨

내가 이제까지 착하게 살았을까
? 아니면 악하게 살면서 선한 탈을 쓰고 선한 사람들과 어울렸을까? 이런 생각이 이즈음 자주 떠오른다. 살피자면 나로서는 당찮은, 하늘 위의 것이지만 내 몫인 내 감성(感性)만큼은 내가 토해도 남에게는 해롭지 않으려니 여겨서 뇌까린다.


   먼저, 나날의 삶에서의 착함()과 나쁨()을 생각해본다. 법은 뒤로하고, 내 생각과 말과 움직임을 내 스스로 마르거나 다듬어내지 않으면서도 얻어지는 좋은 기분이 되면 내가 사귀며 부닥치는 그 어떤 대상이든 상관없이 상대를 선하다고 여긴다.

나도 그가 밉지 않으니 나 또한 선()하다고 할 판이다. 좀 넓혀서, 이는 내가 마주하는 그 어떤 것도 나와 같은 품성(稟性)의 말과 행동일 것이라고 그려보는 전제에서만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서로는 피해 없기에 둘 다 착하다. 다만 지금 여기서 이 순간만이 이런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과거나 미래는 이 저울로는 달 수 없으니 무의미하다. 그래서 선악의 가름은 내가보고 생각하는 그대로(주관), 그래서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원수 같은 놈, 우리부모를 죽인 놈, 너도 죽어보라며 달려들어 흉기로 무참히 그를 살해 했다고 했을 때,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사람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니다 모두 악인일 것이다. 그래. 둘 다 상대편의 귀한 목숨을 앗았기에 모두 악일 것이다. 더욱 그가 속한 사회적 윤리도덕기준으로 보아 둘 다 악인이다. 역시 그 기준에 들어맞는 사실 여부에 달려있겠다. 하지만 그리 판별하고 해석해 보기로 한다면 내가 그 어느 한 쪽 당사자로 들어가야 할, 온전히 당시의 심리상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판을 가늠하는 잣대, 즉 공정과 정의를 기준으로 하는 가늠자는 당사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 3의 것들이다. 선악의 판단은 그들의 개인적 이해, 혈연관계상의 이해, 더 나아가 윗대로의 확대, 이런 연관 내지 장래에 이루어질 예상을 현실화한 문제로서의 감정 이입이 혼합된 것이라면 그 판별은 객관적으로도 더 어려울 것이다. 이 때 쌍방은 서로 선의 입장에 서서 행동했다할 것이기에 그렇다.



선악은 동시적 사고에서, 맞닿아 있기에 더 어렵다. 둘 다 내가 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데, 그러면 다 선이었을까? 뒤집어서, 둘 다 내가 선이라고 여기니 악은 없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선악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입에 담거나 삿대질 할 일이 아닌 것 같은 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느 한 시점을 정해서 그 시점에서 정해진 잣대로 재기 때문에 어느 쪽은 선, 다른 쪽은 악이라고 일컬음직하니 이것이 께름하다. 또 달리, 그 시점(時點)의 통념으로 귀중한 생명을 자기감정소실의 대체수단으로 여긴 것이 악이라고 한다면 그 귀중함을 일깨운 실상으로서의 절대적 공적(?)은 우리 같은 인간이 가늠해야 하는 대상인가 하는 의문 또한 가시지 않는다. 즉 우리가 행하는 행동의 모든 것의 주체-이 경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한된 인간으로 만들어졌다-는 우리를 이룬 절대자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악행은 선을 향한 한 축일 따름이니 입에 담을 거리가 아닌 것 같아서 괴롭다.


   둘째, 사회구성 일원으로서의 착함과 악함을 생각해 본다. 내가 속해있는 사회공동체가 갖고 있는 법질서 안에서 온전히 순응하여 살아간다면 선이 될 터인데 여기에는 그 사회가 처한 역사적 시점의 근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이 또한 가변적인 선악의 개념일 될 터다. 지배원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악이 될 것인 데 그 지배 원리가 어느 그 시기에서만이 온전히 정당한 선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지배적 규범 등이 바뀔 수 있는 때, 그 구조-얼개-에서는 선과 악의 잣대는 그 잣대를 쥐는 쪽의 해석(법과 규칙)에 따라 달리 매겨질 터이니 이 또한 선악의 위치가 뒤바뀔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그러니 역시 우리의 가늠자는 시대적 제약과 공간적 제약의 범주에 든 구성원들의 주장(지배원리인 법규)에 의한 것이기에 역시 어느 시기에는 사그라질 해석일 수밖에 없다.



예증하면 이념대립상태의 국가 간의 대치국면에서 한 나라의 적대국에 대한 살상행위가 그 나라에선 정당한 선으로 해석될 것이고 상대국의 처지에서는 악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이니 이 또한 절대적 선악의 정의가 될 수 없게 된다. 이 두 나라에서의 선악 매김은 헛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선악은 진리에 속한 개념이기에 그렇다.



  셋째, 전통과 기록을 근간으로 받아드려지는 선악구분은 재해석(再解釋)
으로서만 가능하여 그 해석 여하에 따라 선과 악은 분명히 뒤집혀서 늘 상반의 논란거리를 달고 이어갈 것이다. 생각해 본다. 전통적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신앙인들은 그 고기를 먹는 쪽을 악인으로 매도(罵倒)할 것이다. 그들의 전통이 이를 어기면 죄인으로 여길 터이니 그들은 선의 쪽이고 먹는 쪽은 벌을 받아야하는 악의 쪽이 될 것이므로 그렇다. 역시 잘라 말할 수 없는, 그렇게 보는 쪽의 마음과 뜻에 달렸을 뿐이다.





   넷째, 미래 사회 여러 형국에서의 선악 가늠은 우리의 잣대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선악은 상반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선 쪽에서 악이라고 일컫는 것은 선이라고 자임하는 쪽의 주장이고, 반대로 선이 악이라고 여기는 그 악 쪽에서 보면 그 나름의 정당한 선이라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악함이 선이라고 여기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다.



되짚어 보아야겠다. 우리의 생각 울안에 넣어서 악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은 크고 작음은 말할 것 없이 그 주체가 미숙(어린이, 정신질환자)한 쪽은 그들이 저지른 것도 우리의 법 감정 윤리기준으로 보이는 악행은 악행으로 보되 처벌의 가두리를 벗는다고 하니 이때에 그들 자신은 스스로 악이라고 여기질 않을 터인데 그렇다고 선행이 되지는 않을 터이다. 넓혀서, 사회구성원 집단 간, 더 넓게 국가 간, 상극인 신앙관의 집단 상호간에 일어나는 저주와 멸시와 유혈소멸의 참극에서도 그대로 서로 선을 주장할 터이니 이점에서는 몸이 떨릴 지경까지 가지만 실마리는 끝을 찾을 수 없다. 해서 거듭 생각한다.   



선과 악에 관한 한 내로라하는 모든 개인과 집단은 쌍방이 모두 그들 주관적 해석과 주의 주장에 다름 아닌 것 같아서 또 내 머리를 흔든다. 이 생각의 끝은 오직 우리 몫이 아닌 것으로 여김으로써 풀릴 뿐이다. 만들어진 모든 사물의 자유의지(自由意志)는 국소적이고 제한적이라고 생각이 미치는 데,  여기서 선악의 판별은 오직 창조원인(原因)의 몫이므로 나는 그 원의(願意)의 ()에 다가감으로써, 선한 쪽으로 조금이라도 기울어보려 안달하며 나름의 생각으로 그 길을 걸어 갈 따름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다져도 선악의 마름질은 인간의 몫이 아니고 절대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 다른 체제와 다른 문화 환경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진리의 선과 악을 판별할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믿을 뿐이다. 거듭 생각하지만 그 믿음은 역시 시공(時空)의 제약일 수 밖에 없다. 고 여기면서 나, , 우리 모두는 내 존재의 근원에 가 닿는 그 때 비로써 내 이런 저런 생각이 다듬어질 것이다. 사랑의 울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일 수 없다.


한참 몽상(夢想)의 나래를 한 것 펴봤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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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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