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21.191230 백치변白痴辨
내가 이제까지 착하게 살았을까 ? 아니면 악하게 살면서 선한 탈을 쓰고 선한 사람들과 어울렸을까 ? 이런 생각이 이즈음 자주 떠오른다 . 살피자면 나로서는 당찮은 , 하늘 위의 것이지만 내 몫인 내 감성 ( 感性 ) 만큼은 내가 토해도 남에게는 해롭지 않으려니 여겨서 뇌까린다. 먼저 , 나날의 삶에서의 착함 ( 善 ) 과 나쁨 ( 惡 ) 을 생각해본다 . 법은 뒤로하고 , 내 생각과 말과 움직임을 내 스스로 마르거나 다듬어내지 않으면서도 얻어지는 좋은 기분이 되면 내가 사귀며 부닥치는 그 어떤 대상이든 상관없이 상대를 선하다고 여긴다. 나도 그가 밉지 않으니 나 또한 선 ( 善 ) 하다고 할 판이다 . 좀 넓혀서 , 이는 내가 마주하는 그 어떤 것도 나와 같은 품성( 稟性 ) 의 말과 행동일 것이라고 그려보는 전제에서만 있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경우에 서로는 피해 없기에 둘 다 착하다 . 다만 지금 여기서 이 순간만이 이런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 과거나 미래는 이 저울로는 달 수 없으니 무의미하다 . 그래서 선악의 가름은 내가보고 생각하는 그대로 ( 주관 ), 그래서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원수 같은 놈 , 우리부모를 죽인 놈 , 너도 죽어보라며 달려들어 흉기로 무참히 그를 살해 했다고 했을 때 ,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사람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 아니다 모두 악인일 것이다 . 그래 . 둘 다 상대편의 귀한 목숨을 앗았기에 모두 악일 것이다 . 더욱 그가 속한 사회적 윤리도덕기준으로 보아 둘 다 악인이다 . 역시 그 기준에 들어맞는 사실 여부에 달려있겠다 . 하지만 그리 판별하고 해석해 보기로 한다면 내가 그 어느 한 쪽 당사자로 들어가야 할 , 온전히 당시의 심리상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 그런데 그 판을 가늠하는 잣대 , 즉 공정과 정의를 기준으로 하는 가늠자는 당사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 3 의 것들이다 . 선악의 판단은 그들의 개인적 이해 , 혈연관계상의 이해 , 더 나아가 윗대로의 확대 , 이런 연관 내지 장래에 이루어질 예상을 현실화한 문제로서의 감정 이입이 혼합된 것이라면 그 판별은 객관적으로도 더 어려울 것이다 . 이 때 쌍방은 서로 선의 입장에 서서 행동했다할 것이기에 그렇다 . 선악은 동시적 사고에서 , 맞닿아 있기에 더 어렵다 . 둘 다 내가 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데 , 그러면 다 선이었을까 ? 뒤집어서 , 둘 다 내가 선이라고 여기니 악은 없어야 하는 것인가 ? 그래서 선악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입에 담거나 삿대질 할 일이 아닌 것 같은 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 어느 한 시점을 정해서 그 시점에서 정해진 잣대로 재기 때문에 어느 쪽은 선 , 다른 쪽은 악이라고 일컬음직하니 이것이 께름하다 . 또 달리 , 그 시점 ( 時點 ) 의 통념으로 귀중한 생명을 자기감정소실의 대체수단으로 여긴 것이 악이라고 한다면 그 귀중함을 일깨운 실상으로서의 절대적 공적 (?) 은 우리 같은 인간이 가늠해야 하는 대상인가 하는 의문 또한 가시지 않는다 . 즉 우리가 행하는 행동의 모든 것의 주체 - 이 경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한된 인간으로 만들어졌다 - 는 우리를 이룬 절대자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악행은 선을 향한 한 축일 따름이니 입에 담을 거리가 아닌 것 같아서 괴롭다 . 둘째 , 사회구성 일원으로서의 착함과 악함을 생각해 본다 . 내가 속해있는 사회공동체가 갖고 있는 법질서 안에서 온전히 순응하여 살아간다면 선이 될 터인데 여기에는 그 사회가 처한 역사적 시점의 근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이 또한 가변적인 선악의 개념일 될 터다 . 지배원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악이 될 것인 데 그 지배 원리가 어느 그 시기에서만이 온전히 정당한 선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그 지배적 규범 등이 바뀔 수 있는 때 , 그 구조 - 얼개 - 에서는 선과 악의 잣대는 그 잣대를 쥐는 쪽의 해석 ( 법과 규칙 ) 에 따라 달리 매겨질 터이니 이 또한 선악의 위치가 뒤바뀔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 그러니 역시 우리의 가늠자는 시대적 제약과 공간적 제약의 범주에 든 구성원들의 주장 ( 지배원리인 법규 ) 에 의한 것이기에 역시 어느 시기에는 사그라질 해석일 수밖에 없다 .
예증하면 이념대립상태의 국가 간의 대치국면에서 한 나라의 적대국에 대한 살상행위가 그 나라에선 정당한 선으로 해석될 것이고 상대국의 처지에서는 악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이니 이 또한 절대적 선악의 정의가 될 수 없게 된다 . 이 두 나라에서의 선악 매김은 헛된 것이 된다 . 왜냐하면 선악은 진리에 속한 개념이기에 그렇다 . 셋째, 전통과 기록을 근간으로 받아드려지는 선악구분은 재해석 ( 再解釋 ) 으로서만 가능하여 그 해석 여하에 따라 선과 악은 분명히 뒤집혀서 늘 상반의 논란거리를 달고 이어갈 것이다 . 생각해 본다 . 전통적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신앙인들은 그 고기를 먹는 쪽을 악인으로 매도 ( 罵倒 ) 할 것이다 .
그들의 전통이 이를 어기면 죄인으로 여길 터이니 그들은 선의 쪽이고 먹는 쪽은 벌을 받아야하는 악의 쪽이 될 것이므로 그렇다 . 역시 잘라 말할 수 없는 , 그렇게 보는 쪽의 마음과 뜻에 달렸을 뿐이다 . 넷째, 미래 사회 여러 형국에서의 선악 가늠은 우리의 잣대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 선악은 상반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 선 쪽에서 악이라고 일컫는 것은 선이라고 자임하는 쪽의 주장이고 , 반대로 선이 악이라고 여기는 그 악 쪽에서 보면 그 나름의 정당한 선이라고 주장할 근거 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다면 악함이 선이라고 여기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다 . 되짚어 보아야겠다 . 우리의 생각 울안에 넣어서 악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은 크고 작음은 말할 것 없이 그 주체가 미숙 ( 어린이 , 정신질환자 ) 한 쪽은 그들이 저지른 것도 우리의 법 감정 윤리기준으로 보이는 악행은 악행으로 보되 처벌의 가두리를 벗는다고 하니 이때에 그들 자신은 스스로 악이라고 여기질 않을 터인데 그렇다고 선행이 되지는 않을 터이다 . 넓혀서 , 사회구성원 집단 간 , 더 넓게 국가 간 , 상극인 신앙관의 집단 상호간에 일어나는 저주와 멸시와 유혈소멸의 참극에서도 그대로 서로 선을 주장할 터이니 이점에서는 몸이 떨릴 지경까지 가지만 실마 리는 끝을 찾을 수 없다 . 해서 거듭 생각한다 . 선과 악에 관한 한 내로라하는 모든 개인과 집단은 쌍방이 모두 그들 주관적 해석과 주의 주장에 다름 아닌 것 같아서 또 내 머리를 흔든다 . 이 생각의 끝은 오직 우리 몫이 아닌 것으로 여김으로써 풀릴 뿐이다 . 만들어진 모든 사물의 자유의지 ( 自由意志 ) 는 국소적이고 제한적이라고 생각이 미치는 데, 여기서 선악의 판별은 오직 창조원인 ( 原因 ) 의 몫이므로 나는 그 원의 ( 願意 )의 축 ( 軸 ) 에 다가감으로써 , 선한 쪽으로 조금이라도 기울어보려 안달 하며 나름의 생각으로 그 길을 걸어 갈 따름이다 .
그러므로 아무리 다져도 선악의 마름질은 인간의 몫이 아니고 절대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 , 다른 체제와 다른 문화 환경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진리의 선과 악을 판별할 한계가 있는 것이다 . 다만 그렇게 믿을 뿐이다 .
거듭 생각하지만 그 믿음은 역시 시공 ( 時空 )의 제약 일 수 밖에 없다 . 고 여기면서 나 , 너 , 우리 모두는 내 존재의 근원에 가 닿는 그 때 비로써 내 이런 저런 생각이 다듬어질 것이다 . 사랑의 울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 참 ’ 일 수 없다 .
한참 몽상 ( 夢想 ) 의 나래를 한 것 펴봤다 ./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