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1

외통인생 2020. 8. 20.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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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6.071223 내 마음1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성찰의 기회를 핑계로 비껴서, 세월만 가면 나으려니 했는데 어두운색은 검게 짙어만 가고, 털어 낼 수도 없고. 뜯어고칠 수도 없는, 참으로 나를 옭아가는 어떤 힘, 오늘에 그 힘에 이끌려 성사를 봄으로써 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오늘의 고해성사로 나를 옭았던 밧줄은 풀렸다. 아니 마음에 물든 진회색의 먹칠을 말끔히 씻어냈다. 이어서 보석으로 주신 말씀을 기꺼이 실행하고 나니 날아갈 듯이 가볍다.

내가 영감님의 연미사를 올림으로써 가는 길에 꽃을 뿌리려 하지만 정작 그 영감님을 나와 인연 지게 한 아내의 영혼에는 알리지 못했으니, 오늘에 와서 연미사를 함께 올려 고유함으로써 난 양쪽 팔에 달렸던 납덩이를 털어 내고 깃을 달고 가볍게 날고 있다.

영감님이 '동두천'의 한 병원에 있을 때 몇 번 병문안을 드렸지만 내 마음 언짢았던 것도 없지 않았다. 아마도 그동안에 연락 없이 집을 비운 데 대한 섭섭함을 억누르면서 찾았던 탓이리라. 그러나 영감님의 마음과 영감님의 자식들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서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을 영감님은 모르시고 이승을 하직하셨을 것이다.

집이 없어 오갈 떼가 없는 영감님을 동네에서  청하고 사정할 때쯤 우리 내외는 이미 앞집 ‘아무개 씨’에게 밭을 가꾸도록 했던 터였다. 하도 부탁하고 애원하기에, 이미 늦은 봄이 되어 씨앗이 돋아난 밭을 도로 찾으려, 씨앗 값까지 물어 주면서 경작자인 앞집에 사정했다. 이렇듯 저희는 영감님께 마음을 썼다. 물론 저희도 늘 돌볼 수 없는 밭뙈기를 영감님이 푸성귀라도 심어서 새로 맞아드린 할머니하고 생활에 보탬이라도 드릴 요량으로 허락했었다.

이제 돌이켜 봅니다. 그해 영감님은 남이 심은 씨앗의 열매를 거두면서 우리 논밭과 딸린 살림집을 돌보게 됐습니다. 

그렇게 된 다음부터 십여 년간은 영감님이 심어서 기른 옥수수를 저희가 사서, 우리가 다 처분할 수 없는 양이면 온 동네에, 친척들에게 무상으로 퍼 돌리면서도 영감님에게 한 푼의 외상도 지지 앓았지요. 온전히 저희의 희생으로 도와드리려고 내 돈으로 사서 거저 나누어주는, 그런, 성심을 다해서 영감님을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영감님과 함께 사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영감님은 한 포기 푸성귀조차도 가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밭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개울 건너 두 뙈기의 논밭은 풀이 자라고 나무가 뿌리 내려서 온통 산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부동산실명제라는 법이 생겼고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밭뙈기를 가꿀 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러던 참에 이번에는 저희 안사람이 앓아눕게 되면서부터 저도 돌보지 못하고 영감님도 손 놓고 계셔서 드디어 온 밭이 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터에 삼 년이나 앓던 안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그동안에 산이 되어버린 농토를 보고 군청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 농지를 환수' 한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그동안에 아내의 병원 생활과 병간호 때문에 돌보지 못한 사실을 군수에게 아뢰고 아내가 떠난 그 이듬해부터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밭을 갈고 묘목을 사서 해마다 심고 풀 베고 거름 주고 물주면서 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에 영감님은 쇠잔해지셔서 농토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고 집안에서만 맴돌았습니다. 영감님이 맞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였습니다. 우리가 영감님의 생계를  도울 수는 없고, 돌보는 자식들도 없다고 하시기에 영감님이 청평 집을 떠날 때까지 기름값이라도 하시라고 적은 돈이지만  다달이 영감님 통장에 부쳐드렸습니다. 현대 이게 웬일입니까. 글쎄, 영감님은 ‘청평’ 집을 비우고 소식도 없이 몇 달을 지냈습니다.

저는 그동안에 열심히 논밭을 가꾸었지만, 안사람의 병원 빚 때문에 그  논밭을 팔지 않으면 안 되게 됐습니다. 글쎄  빚 감당이 어려워 판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나무는 어찌하라고.

아들딸들이 판다는데 내가 내 나무만 살리겠다고 고집부릴 수도 없고, 해서 팔기로 하고 계약했지만, 영감님의 소식은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영감님이 계시던 방의 짐을 들어내기 위해서라도 소재를 알아야 했습니다. 동네 여러분들에게 수소문해서 겨우 동두천 어느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영감님 입원하셨던 병원을 찾게 됐던 것입니다.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형편대로 위문금을 만들어서 따님을 만나 위로의 뜻도 전했습니다. 그때 영감님은 사장님의 성정을 잘 안다면서, 그동안에 연락을 못 드려서 미안하다면서, 송구스러운 기색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흔쾌히 이삿짐을 옮길 것 허락하였습니다. 그러고 따님도 그날은 아무런 이의가 없었습니다. 단지 출가외인이라서 동생인, 영감님의 아들에게 그 일을 의논하도록 일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안에 있는 아드님과 연락을 취하고 또 날을 받아서 만나 뵈었습니다. 그때 아드님은 며느님과 함께 저를 맞았고 저는 두 분의 안내로 어느 음식점에 닿아, 거기서 기탄없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드님 말씀은 아버님의 의향대로 하겠다면서 영감님에게 그 일이 전적인 책임을 미루었습니다.

저는 속았습니다. 따님에게서 아들에게로 아들에게서 아버지께로, 이렇게 밀리면서도 저는 영감님의 병환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미칠까, 보아 적극적으로 응대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또 영감님을 찾아뵙고 굳은 악수로 다졌습니다. 영감님은 내가 그 밭에 이백 그루의 호두나무를 심으면서 있었던 온갖 노고를 보았습니다.

새벽에 와서 연장을 꺼내서 작업하다가 아침때가 되면 물가에 앉아서 빵과 우유를 마시면서 아침을 때우고 쉬지 않고 풀을 베다가, 점심때가 되면 또 물가에 담가 두었던 우유와 숲속의 나뭇가지에 매달아 두었던 떡을 꺼내서 점심으로 때우고 곧 일어나서 일하는 모습을 하루도 빠짐없이 보아 왔습니다. 한 해의 시작부터 낙엽이 질 때까지 작업 과정을 눈여겨 지켜보았습니다.

심을 자리를 측량으로 정하고 그 자리에다 구덩이를 파고 거름을 넣고 그 비싼 호두나무 묘목을 심고 다지고 물주고, 그런 다음에 거름을 주고 잡풀이 빨아먹지 못하도록 둘레에 비닐을 깔고, 여름이면 사흘이 멀다고 자라는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 예초기를 메고 온 밭을, 매일 누비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신을 신은 채로 마루에 벌렁 드러누워서 한숨 자면서 휴식을 취하던 나를 꼭꼭 지켜보았습니다. 영감님은 저에게  ‘쉬어가면서 하시’라는 말을 되뇌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제초제를 뿌리면 되는데 왜 그렇게 고생하느냐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나는 대답했지요. 완강하게, 아주 단호하게 ‘토양을 오염시키면 안 된’다면서 누구든지 제초제를 우리 밭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영감님은 내가 나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올해부터 한두 알씩 호두가 열린다는 것을 알면서, 나무 심는 사람의 결실 보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영감님께서 나와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그런 영감님이었기에 오히려 내 손을 굳게 잡아 놓지 않고 격려했습니다. 내 심경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이심전심의 형편을 말없이 굳게 잡은 손바닥을 통해서 교류되었습니다. 아들하고 상의해서 집을 비워주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도 함께 울었습니다. 황혼의 기러기 떼가 우리 두 사람의 눈동자에 비치어 아른거렸습니다.

그 후에, 따님에게 전화로 연락했더니만 영감님은 동생네가 데려갔다고 하면서 동생네에게 미루었습니다. 또 천안에다 전화했지만, 대답은 냉담했습니다. 구월 말경에나 아마도 ‘청평’에 가게 될 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마도 내가 구월 말까지 비워달라는 시한을 정했기 때문에 그런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의아스럽지만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구월, 하순이 다 되어도 집 비우기는커녕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천안 아들네에 전화했더니 아드님은 영감님의 고집으로, 영감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부득불 영감님을 ‘청평’에 모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시골의 어느 요양원 같은 데에 보냈거나 친척 집에 가 계시는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시골에 사시는 영감님의 동생 댁에 있기로 작정했으면서 구월이 시한이라는 건물명도 기한 안에 방을 차지하고서 억지 부림을 시도했던 깃입니다. 참으로 불손하고 배은망덕의 소행입니다. 아버지를 가둬두고  돈을 뜯어내겠다는 검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시일이 구월 말로 다가오면서 마각이 드러났습니다. 거동이 어려운 영감님을 홀로 산촌에 놓아두고 가버렸습니다. 영감님 아들은 구월 말이면 모든 일이 끝날 것으로 작정하고 달려들었고 나는 한 달의 여유를 더 두고 일을 갈무리하려는가 싶어 믿었는데, 사실을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영감님 아들의 계략을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감님 아들은 흉측스러운 계략으로 영감님을 ‘청평’ 우리 농가에 데려다 놓았던 것입니다. 영감님은 억울하게 유배 아닌 고려장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영감님 아드님은 결국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액수까지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약간의 이사비용 오백만 원만 주면 비켜주겠다는 확실한 의중을 내비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애들하고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받으려고 전화 연락을 했을 때 또다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누나가 알아서 할 것이라며 누나에게 떠미는 것입니다. 당신이 약속해 놓고 왜 누나에게 떠미느냐니까  아드님은 자기도 병원에 입원해야 할 처지라면서 발뺌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결국 약속한 날 '청평'에 찾아갔으나 아들은 안 보이고 누나가 와있으면서 영감님 수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동두천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돌본다며,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동두천에 방을 얻으려면 삼천만 원은 있어야 하니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방을 얻어주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 골짜기에 방을 얻어주겠다고 해도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감님의 살림과 뒷감당까지 다 해야 한다는, 막무가내는 고집의 아들딸을 두신 영감님이 심히 안 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의 형편이 그렇게 용납되지 않음을 설명할 이유는 없겠기에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이 계약을 없었던 것으로 해약하기로 다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위약금을 치를 수밖에 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매수자는 자기 타산 때문에 이 계약을 존속하되 명도에 대한 책임은 매수자가 갖기로 합의이행으로 진행됐습니다. 우리는 영감님께 드리고자 하는 상당액을 매수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일단락 매듭지었습니다.

한데, 아드님과 따님은 영감님을 홀로 내버려 두고서 각기 자기 일에만 매달렸던지, 음식과 반찬을 갖고 오는 날만 몇 시간 머물다가 곧 가버리곤 했다는 이웃의 전갈이 왔습니다. 호두나무밭의 사이사이에 심은 푸성귀를 가꾸려고 들락거리는 할머니와  이웃집의 말을 빌리면 그들이 영감님 대소변을 치우는 일까지 있었답니다. 아들은 딸에게 미루고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모시게 되는 처지가 되면 이혼할 수밖에 없다면서 딸이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다고 했답니다.

며느님은 남편의 병간호도 힘들다는 핑계로 딸에게 밀어붙였습니다. 따님은 시어른이 계시는데, 한집에 살 수는 없으니 잘 사는 동생이 집을 마련해주면 조석으로 보살피겠다는, 그런 지극히 남 대하듯 하는 태도, 가만히 잘 계시는 시골의 동생 집에서 영감님을 굳이 ‘청평’ 집에다가 데려다 놓고 있으면서 한밑천을 잡으려고 떼쓰는 자녀 때문에 영감님은 외롭게 운명하셨습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말입니다.

이웃의 말을 빌리면, 이웃 사람에게 부탁하면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해서 전화를 연결해 주었더니 영감님은 아들인지 며느린지 모르지만, 전화를 받는 이에게 ‘어째서 시골 동생네 집에 잘 있는 나를 데려다가 이렇게 혼자 버려두느냐’면서 애원하니까 저쪽 대답이 ‘거기서 돌아가시오.’라 막말하더라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혀를 차는 것입니다.



영감님. 이제 나도 얼마 남지 않은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수놓아 가면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한데 영감님의 아들딸들은 너무나 아버지를 고통 속으로 몰아갔습니다. 빚에 넘어가는 내 호두나무를 보면서 영감님의 말로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내 나무는 몇 그루는 살아남아서 내 어려웠던 지난날의 일을 말없이 이야기하리라고 믿고, 작은 위안을 억지로라도 갖고 싶습니다.

한데 영감님 가시는 길을 내가 지켜보지 못하였으니, 이점이 아쉽고 섭섭했습니다. 이제 가시는 길에 작은 노자를 마련하여 드렸으니 평안히 가십시오.

언젠가 영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거들랑 한 오십만 원 부조하면 좋겠다. 우리 아들은 부자니까 돈은 필요 없지만, 말이지 그래도… ’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서슴없이 버금가는 돈을 따님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집을 비워야 한다고 이야기했더니 “우리 아들은 몇억씩은 있으니까 내가 살 집은 마련해 줄 것이라는 영감님의 말씀을 영감님의 아들딸들은 식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영감님 가시고 나서 늘 흐린 날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마음이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저승에 갔을 때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이 마음에 작은 구름 덩어리가 걷혀서 한결 가볍습니다. 이다음에 가서 뵙거들랑 외면하지는 마십시오.  

영감님의 명복을 빕니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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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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