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위로

외통인생 2020. 4. 7.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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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7.030110 참사

방 안에 가득한 눈길이 내 얼굴에, 한꺼번에 쏟아지더니 자리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이내 누군가의 재치 넘친 인사말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웠고 이윽고 모두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전엔 생각하지도 못했던 처형들과 동서들의 몸놀림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만들어진 자리인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하든지 흡족한 마음을 드러내리라고 마음은 먹었지만 잊고 싶은 그 일이 빌미가 되어서 만들어진 자리라서 더욱 서먹함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음을 선사하느라 오히려 어색한 몸짓이 되지 않았는지 또한 신경 쓰인다.

웃음은 저마다 다르게 피었다. 위로의 말을 웃음으로 얼버무려야 하는 옹색한 내 처지를 동정과 연민을 섞으면서 어떻게든 반기려 했다.

이미 와있던 아내와 아들은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다른 방에 콕 박혀있고, 나를 기다리든 처 형제간 내외 여러분이 가운데 상을 마주하고는 벽을 등지고 빼곡히 들어차, 그사이를 넓혀서 내 자리를 마련했다.

좁지만 아늑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있어서, 애써 나를 위로하려는 자리로 알맞게, 그만하여 그만 고마울 뿐이다. 음식을 가득히 차려 올리고 술 주전자가 돌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술을 마셔댔고 자리한 여러분은 나의 이런 행동을 부추기기라도 하듯 술잔을 나에게 모았다. 술과는 친숙하지 않은 내가 이렇게 마셔대면 이전엔 아내의 성화로 자리가 이어지지 못했을 텐데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듯 얼굴도 내밀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언약이라도 있었지 않나 생각됐다.

그것은 이 위로의 한 마당에서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난 내 한계를 시험하듯이 들이켰다. 한 순배 지나고, 누군가에 의해서 또 노래가 시작되었다.

꼭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 ‘수의’의 진혼제 자리가 돼야 하는데 엿가락 꼬이듯이 꼬여서 이 자리에 내가 앉아 모든 이의 위로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깊고 깊은 속에는 술기운을 빌려서도 미치지 못한다.

한 층의 막이 있어서 그 밑에는 온갖 내 어리석음으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깊은 연못이 파여 있고 그 연못 속에는 아무리 퍼내도 없어지지 않는 회한(悔恨)의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오늘 나의 울적한 마음을, 술기운을 빌려서 위로받고자 하지 않고 말끔히 씻기지 않는 저 덩어리를 어루만져서 ‘수의’의 혼을 달래고 싶다. 겪어보지 않은 다른 이들은 모를 것인데, 내 아둔한 머리가 깊고 오묘한 갈등의 이치와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싶어서 억울하고 답답함에 또한 발버둥 치며 들이킨다.

모두는 나를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다. 그리하여 나의 흥을 기대하고 내가 변한 모습으로 이 자리를 뜨고, 앞으로 그 기분으로 살아 나가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쉽사리 잊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영영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가족의 참화이고 이 참화의 의미가 어디 있는지를 캐내면서 앞으로 ‘수희’의 넋을 달래야 한다고 혼자 독백하면서 자리의 마련과 어긋나는 이런 내 생각을 밝힐 수가 없어, 차라리 이 자리가 원망스럽다.

나는 내 있는 힘을 다하여 내가 아는 노래, 아니 나만이 아는 노래 ‘사나이 가는 길 웃음만이 있을쏘냐.…’를 외쳤다. 작곡가도 작사자도 가수도 모르는 이 노래, 고향에서 들어 익힌 이 노래를, 목청껏 내 있는 힘을 다해서 불렀다. 노래가 아니라 천둥 같은 소리로 하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수희’를 만나야 하는 절규다. 그 소리가 못 미쳐서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원통 또 원통하리라!!

모두는 어쩔 줄을 모른다. 이분들은 이 곡도 가사도 모르니 노래의 잘잘못을 평할 밑뿌리조차 찾을 수 없고, 다만 그 노랫소리 속에 원통한 한을 담아 세상을 향해서 동댕이치고 부르짖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아니, ‘재영’이 아범은 모두 잊고 훌훌 털고 있을 것이라는, 너무나 모르는, 너무나 단순한 생각을 지금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집을 소개한 이, 그런 집을 절찬하는 이, 이들은 형제의 정을 그리면서 이웃하려 애썼다. 아내만이 외로운 고도 ‘대구’에서 좋은 집을 쓰고 산들 정을 못 나누는 외톨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고 왜 감옥생활처럼 외롭게 사느냐며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혹시 그렇다면 그 작은 실마리가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불씨가 된 것을 스스로 한탄하면서 나의 노랫소리에 그들만은 귀를 기울이고, 그 고함에 잠긴 의미를 새기는지 또한 모른다.

세상을 향해서 소리친다.
“내 딸 ‘수희’를 살려내라!!” 그 소리는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쏘냐.
결심하고 가는 길 가로막는 폭풍이 어이없으랴.
푸른 희망을 가슴에 부여안고 떠나온 정든 고향을
내 다시 돌아갈 때 열 굽이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보리라.’

‘꽃잎을 날려보리라’, 미려한 말과 소리로 이어질 법한 노랫말을 뒤엎고, 포효(咆哮)의 천둥 같은 울부짖음이다.

자리는 영문을 모르는 듯 어긋난 박자로 어색하게 응답했다.

나는 이런 때, 내 기분대로 하여 그 자리를 면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란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내 한 몸 고달픈 것은 개의치 않고 남에게 호의적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서, 오늘도 나름의 희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호 평안을 촉진하는 나름의 방법에 별다른 의문이나 이상을 느끼지 않으니 이런 것이 아마도 이번과 같은 불상사를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내 노래 소리만 높아질 까닭만 남았다.

모든 이는, 내 주위의 모든 이는 어떤 연유에서든지 딸 ‘수희’의 죽음과 떨어질 수 없는, 인과(因果)의 형태와 상관없이 한 끈으로 이어지고 있음도 난 안다. 이것이 내가 있게 하는, 나와의 상응(相應) 관계로 있게 됨이 내 여기에 있음으로써 확실해지는데, 이 어찌 오묘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 있으니 여기 있는 모든 이는 나와 상관된, ‘수희’와 상관된, 나아가 ‘수희’의 죽음과 상관된 사람일 것인데 어찌 나만 취해야 하는지!

유관(有關)의 실체(實體)와 유관(有關)의 인과(因果)적 연유(緣由)가 다르더라도 ‘수희’는 이 자리에 없고, 이 없음이 모든 이와 연(緣)줄을 닿아있게 하는 것이리라!/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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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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