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구로(來時舊路)
송나라 때 원거화(袁去華)의 '서학선(瑞鶴仙)'이란 작품이다. "교외 들판 비 지난 뒤, 시든 잎 어지럽게, 바람 잔데 춤을 춘다. 지는 해 나무에 걸려, 근심겹게 고운 모습. 먼 산이 어여뻐도, 올 적에는 예전 길로. 아직도 바위의 꽃, 어여쁜 황색 반쯤 폈네. 지금에 와서 보니, 냇가엔 흐르는 물, 사람은 전과 같고(郊原初過雨, 見敗葉零亂, 風定猶舞. 斜陽挂深樹, 映濃愁淺黛. 遥山眉嫵, 來時舊路. 尚巖花, 嬌黄半吐. 到而今, 唯有溪邊流水, 見人如故)." 들판에 비가 지나가자 시든 잎이 진다. 비가 개더니 석양이 걸렸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다. 반쯤 핀 국화, 냇물 소리도, 세상과 사람도 그대론데 그것을 보는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추사 김정희의 글이다. "책을 저술하는 것을 옛사람은 흔히 산을 보는 것에 견줘 논하였다. 왕추루(王秋樓)가 '석촌시권(石邨詩卷)' 끝에다 이렇게 썼다.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다시 한 걸음도 더 나아갈 곳이 없으면, 예전 길을 따라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대단히 높은 격조가 있다(著書, 古人多以看山論之. 王秋樓題石邨詩卷末云 : '上毘盧頂者, 無更進一步處, 則不得不從舊路下來.' 此言大有高格耳)." 이미 난 길을 따라 비로봉 정상에 올랐다. 꼭대기에 마음을 둘 때는 앞만 보고 위만 보았다. 꼭대기를 얻었으면 다시 내려와야 한다. 글쓰기도 그렇다. 심력을 쏟아 정점에 닿은 뒤엔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사이 듬직한 무언가가 내 안에 들어 있다.
추사는 이 말이 퍽 좋았던 모양이다. 이최상(李最相)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에서도 이렇게 썼다. "무릇 태산의 꼭대기에 오른 사람이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갈 곳이 없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옛길을 따라 내려올 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문장에 마음을 둔 사람에 게 눈을 밝게 해 줄 지점인데 어떨지 모르겠구려(凡到泰山頂者, 無更進一步處. 則不得不從舊路下來而已. 是今日留心文章者, 所可明眼者, 未知如何)." 좋은 글을 쓰고 싶은가. 옛길을 따라 오르더라도 꼭대기에서 다시 내려와야 한다. 내려놓고 자기화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높아 보여도 남 따라가지 않고 마침내 내 길을 가야 내 글이다. 옛길을 따르되 새 길을 열자.//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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