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9.001218 종로네거리 엿장수
해방의 참 뜻을 미처 모르고 어영부영 한 달이 지났다 . 글이야 한글을 배운다고 해도 우선은 애들을 통솔해야 하는 구령을 만들지도 못하여 각 학교 나름의 임의 조치가 불가피했다 . 따라서 학교마다 ,
선생마다 발상이 백출했다 .
우선 우리들의 학교생활의 시작이 ‘ 안녕 ’( 오하요 ) 와 ‘ 예 ’( 하이 ) 가 어색하고 입 붙어서 소리 나지 않았다 .
구령만 해도 ‘ 차려 ’
의 순우리말은 몇 달이 지나고서야 불리었고 그때까진 ‘ 기착 !’( 氣着 :
교쓰께 ; 차렷 ) 이였으니 , 그야말로 기가 차는 노릇이다 .
일거수일투족이 구령에 의해서만 집단이 통솔되는 특질을 감안 할 때 비로써 알 수 있듯이 학교생활에 일대 혼란이 일고 있었다 . 아무 대책이 없으니 얘들아 ‘ 저리 가거라 .’ ‘ 이리 오너라 .’ 식으로 됐고 집단체조나 노래는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 ‘
갈가마귀 ’
떼 모양으로 앞서가는 애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고 손짓으로 몰아가는 선생님의 수고 또한 측은하다 . 우리들은 공중에 던져진 풍선같이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니는 형편이 됐고 ,
망하는 것이 무엇이고 새로 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우리네가 이 기막힌 민족의 설움인들 알기나 했겠는가 !
주도하든 일본인 선생님들은 종적을 감추고 조선인 선생만 남아서 이 반 저 반 징검다리 가르침에 애들은 무성한 상사 ( 想思 )
의 급류를 타고 공산주의 나라로 자유 ( 자본 )
주의 나라로 자맥질 해 떠내려간다 .
아직은 우리 동요나 가곡은 보급되지 않았고 재빠른 선생님은 일본 동요 곡에다가 우리말가사를 지어 붙여서 가르치기도 했다 .
음치여서 노래를 늘 경원하던 나였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단 한 가지 노래 ,
그 선생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은 노래 ,
지극히 단조롭고 짤막한 토막노래가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
서울을 동경해서였을까 ?
아니면 노래의 멜로디가 너무나 엉킨 ,
엉터리 노래여서 그럴까 ?
이제까지 우리의 정서와 동떨어진 노래만 부르다가 우리와 친근한 지명과 우리의 생활과 이웃에서 찾을 수 있는 모습을 그려서일까 ?
아무튼 곡도 가사도 또렷이 생각나는 이 토막노래가 ‘ 오르간 ’
반주도 없이 가르치는 선생님얼굴과 교차하며 선명히 떠오른다.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어 / 엿장수늙은이가 있어 가위질 하네 / 천천히 걸어가며 엿을 팔아요 ./
석양에 한량 ( 限量 )
없이 가며 엿을 팔아요 .’ 요게 모두다 .
석양의 종 거리를 지극히 간명하게 표징 하는 해방 후의 첫 노래였을 것이다 .
검증되지도 않았고 악보도 없으니 노래 책에 실리지도 않은 이 가사와 곡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
요행을 바란다면 그 때의 다른 친구들이 아직 고향을 지키면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을 것을 바랄 뿐이다 .
얼굴이 넓적하고 자그마한 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이 선생님은 서울에서 공부를 했나보다 .
촌뜨기시골소년 내게 ‘ 종로 ’
거리란 이름을 알려줌으로서 동경하던 서울의 풍경을 그리게 한 ,
그 선생님의 생사는 어찌 됐을까 !
격동의 광복혼란기를 슬기롭게 엮어간 스승의 안위가 뒤늦게 궁금하다 ./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