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9년 5월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던 홍국영(洪國榮)의 누이 원빈(元嬪)이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송덕상(宋德相)이 상소를 올렸는데, 서두에 '원빈께서 훙서(薨逝)하시니 종묘사직이 의탁할 곳을 잃었다'고 썼다. 당시 정쟁에 밀려 숨죽이며 지내던 채제공이 낮잠을 자다가 집사가 가져다준 그 글을 보았다.
채제공이 서두를 읽다 말고 놀라 말했다. "해괴하다. 원빈이 죽었는데 어째서 종묘사직이 의탁할 곳을 잃는단 말인가? 400년 종묘사직이 과연 일개 후궁에게 힘입어 의탁했더란 말인가? 게다가 후궁이 죽었는데 어째서 서거(逝去)라 하지 않고 훙서(薨逝)라 하는가?" 그가 이같이 혼자 중얼거렸을 때 그 자리에 가까운 친지 한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채제공은 한동안 더 낭패의 세월을 보내다가 형조 판서에 제수되어 입시했다. 정조가 그를 환영하며 말했다. "근래 시끄럽던 일 말고도 경이 또 위태로운 처지를 겪어 거의 면치 못할 뻔하였소. 내가 각별히 보호한 덕분에 겨우 면한 것을 알고 있소?" 채제공이 영문을 몰라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하자 정조가 말했다. "송덕상이 흉측한 상소를 올렸을 때 경이 그 상소문의 첫머리 글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한 일이 있었소?" 그러면서 정조는 낮잠을 갓 깨어 혼잣말처럼 했던 그 말을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세하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채제공이 놀라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자 정조가 다시 말했다.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그대가 한 말이 홍국영의 귀에 들어가 그가 펄펄 뛰면서 들어와 온갖 방법으로 죄를 뒤집어씌워 분풀이하려는 것을 내가 간신히 말렸소."
채제공이 이 말을 듣고 물러나와 얘기했다. "아! 내가 이제껏 생각해 봐도 누가 이처럼 쏜살같이 얘기를 전했는지 알 수가 없다. 두려워할 만한 것은 말이다(可畏者言也)." 다산의 '혼돈록(餛飩錄)'에 나온다. 그때 사랑방에 위로차 찾아왔던 가까운 친지 중 한 사람이 그 말을 듣자마자 그 길로 홍국영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말 간수를 잘못해 벌어지는 사달이 꼬리를 문다. 말이 참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