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경북 울진 성류굴(聖留窟)에서 신라 때 각석(刻石) 명문 30여개를 발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중 '정원 14년(798) 무인년 8월 25일에 승려 범렴이 다녀가다(貞元十四年, 戊寅八月卄五日, 梵廉行)'라는 명문은 1222년 전인 신라 원성왕 14년 때 것이다. 그 외 화랑 임랑(林郞)과 공랑(共郞)의 이름, 병부사(兵府史)라는 관직명, 장천(長天) 등의 지명도 나왔다 한다.
성류굴 기록은 이미 고려 때 이곡(李穀)이 쓴 '동유기(東遊記·1349)'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성류굴 앞엔 성류사가 있었고, 굴은 어둡고 깊어 절의 승려가 횃불로 인도했다고 한다. 무릎으로 걷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좁은 구멍 사이로 기어들어 가면 부도(浮圖) 같고 불상 같은 갖은 형상의 종유석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 이번에 발견된 각자(刻字)는 훨씬 더 깊이 들어간 지점에서 발견됐다.
성류굴은 성인(聖人)이 머문 굴이란 뜻으로, '삼국유사' 탑상 편 '오대산의 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과 '명주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寶叱徒太子傳記)'에 나오는 보천(寶川), 또는 보질도(寶叱徒) 태자가 그 주인공이다. 정신왕(淨身王), 즉 신라 31대 신문왕의 아들 보천은 왕위를 사양하고 불법만 닦았다. 오대산 우통수의 물을 길어 마셔 나중에는 허공을 붕붕 날아다녔다. 그는 유사강(流沙江) 너머 울진국 장천굴(掌天窟)로 가서 '수구다라니경'을 밤낮으로 독송했다.
어느 날 굴신(窟神)이 보천 앞에 나타났다. "내가 이 굴의 신이 된 지 2000년이다. 오늘에야 수구다라니경의 참뜻을 알았다. 보살계를 받고 싶다." 굴신이 불법(佛法)을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다. 보천이 보살계를 주자, 이튿날 굴의 형체가 사라졌다.
이후 굴 이름은 장천굴에서 성인 보천이 머물렀던 곳이라 해서 성류굴로 불렸다. 수천년간 재래 신앙의 성소(聖所)였던 굴의 주인이 보천을 만나 불의에 귀의함에 따라 이를 기린 성류사가 세워졌고, 신라 화랑과 승려들이 이곳을 수련과 기도의 성지로 여겼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볼수록 허튼 구석이 없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