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남을 용서할 수가 없다.
용서는 스스로 죄인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아무에게도 그런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백지처럼 하얀 사랑의 바탕, 진리에다 흔적만을 남기는 존재일 뿐이다. 진리의 원천만이 용서의 주체이고 사람들 사이의 용서는 진리를 향한 자기 순화(純化)과정의 독백(獨白)에 불과하다. 용서는 오직 하느님(절대자)에게만 있다. 사람은 단지 자기의 흔적을 스스로 물들이지 않아야 하며 자기의 흔적으로써 남의 흔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오로지 나를 진리의 바탕으로 가게 하기 위한 자기 정화의 한 표현이고 실천이라야 마땅한,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절대자의 뜻에 합당한, 남을 용서하는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가 가지고 있는 상대에 대한 감정을 내 희생으로 순화해야 한다는 것이 옳을 성싶다. 해서, 우리가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한없이 내 감정을 진리의 영으로 이끌어가는 행위래야 하고 거기에 알맞은 어휘이고 행위래야 옳을 것 같은 데 마땅한 단어가 없다.
남이 내게 잘못 했다고 여기는 시원(始原)은 나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지 절대자인 하느님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잘하고 상대가 아무리 몹쓸 짓을 내게 했어도 창조 과정의 한 부분으로 보는 절대자의 숨은 뜻을 피조물인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신의 말'이고 인간은 그저 '물러서'는 것, 곧 '당하는' 것, ' 희생' 하는 것만이 신의 뜻 '용서'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용서한다.’를 ‘ 내가 죽는다.’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를 용서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내가 그를 위해 죽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 로 바꿔 써야한다. 그리고 그 길로 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세속적 삶에도 이 진리는 영원히 살아서 그 길로 가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마도 그가 사는 사회의 실정법의 바탕에서 각자의 감정이 드러날 것이므로 용서의 개념도 다를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백지처럼 하얀,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동질화의 길로 나아감으로써 언젠가 이 목적에 도달할 뿐이다. 여기에 용서의 진의가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8115,050813 /외통 徐商閏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