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化門

사적跡蹟迹 2013. 9. 1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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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化門

 

1910年 朝鮮이 亡하자 日帝는 景福宮안에 總督府 廳舍를 세우면서 光化門을 撤去하려 했습니다. “아아 光化門이여, 너의 生命이 이미 傾角에 달렸구나.” 서슬 퍼런 日帝의 暴政 아래서 勇敢하게 나선 것은 日本人 民俗學者 柳 宗悦(やなぎ むねよし)였습니다.

 

그는 日本人들에게 江戶城이 破壞될 處地에 놓인 場面을 想像해보라고 呼訴했습니다. 日帝는 光化門을 없애지 못하고 1927年 景福宮 東門인 建春門 北쪽, 지금의 國立民俗博物館 자리로 옮겼습니다.

 

光化門은 太祖 때인 1395年 景福宮 創建과 함께 宮闕의 南쪽 出入門으로 들어섰습니다. 처음 이름은 ‘正門’입니다. ‘太祖實錄’은 새 宮闕의 作名 責任을 맡은 鄭道傳이 붙였다고 伝합니다. 世宗 때 集賢殿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光化門’의 由來로 ‘빛이 나라 밖 四方을 덮고 敎化가 萬方에 미친다’는 解析이 있지만 意見이 엇갈립니다. 光化門은 壬辰倭亂 때 불탔다가 大院君이 1868年 王權을 强化하느라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復元됐습니다.

 

光化門은 600年 間 歷史의 激變을 지켜봤습니다. 李芳遠이 1398年 反對派 鄭道傳을 處斷하고 權力을 掌握하기 爲해 軍事를 이끌고 온 곳이 光化門이었습니다. 中宗 反正 때도 朴元宗이 이곳으로 反軍을 몰고 왔습니다. 종종 士大夫들의 上疏 場所이기도 했습니다. 中宗이 趙光祖에게 死藥을 내리자 儒生 數百 名이 門 앞에 모여 눈물로 誣告를 呼訴했습니다.

 

6•25 때 爆擊으로 살라진 光化門은 1968年 朴正熙 大統領 때 鐵筋 콘크리트 建物로 現在 자리에 세웠습니다. 朴 大統領이 쓴 光化門 懸板 글씨를 놓고 當時 文化財廳長이었던 者가 그 懸板도 하나의 文化財인 것도 妄却하고 正祖 임금 글씨로 바꾼다는 方案을 내놓아 어이없는 論難을 빚었는데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出身 性分에 疑心 마쳐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太祖 때 光化門 懸板을 누가 썼는지는 記錄이 전혀 없습니다. 大院君 때 懸板을 쓴 主人公은 그간 學界에서 書畵家 丁學敎로 여겨왔지만 얼마 前 發掘된 ‘景福宮 營建日記’에 光化門 懸板 書寫官으로 記錄된 訓鍊大將 任泰瑛이라는 說이 有力합니다.

 

文化財廳이 2009年까지 光化門을 南쪽으로 14.5m 당겨 原來 位置에 木造로 짓고 月臺와 해태像을 光化門 앞에 復元한다는 計劃을 發表했습니다. 朝鮮 王朝의 正宮인 景福宮의 옛 모습을 되찾는 마지막 作業이라 합니다. 그런데 가까운 日本에도 2次 大戰으로 燒失된 文化財(天守閣 等)을 콩크리트로 잘도 復元햇것만 결국 헐어버리고 새로 세웠네요 좀 有別나네요.

 

徐廷柱는 光化門을 가리켜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宗敎’라고 노래했습니다. 예로부터 光明을 崇尙하고 平和를 사랑하던 우리 民族 固有의 精神을 崇高한 光化門의 모습에서 되찾게 되기를 바라며 자기 마음에 안 든다거나 懸板을 쓴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하여 過去의 歷史와 文化를 마구 뜯어내고 헐어버리는 作態는 하자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當時 노무현 前 大統領이 正祖를 버금가는 聖君이라고 阿附 性 發言을 하여 國民을 失笑케하는 作態는 이제 그만 두어야겠네요 /作成者 黃圭源

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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