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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 韓國에서는 每年 3,500余名의 醫師가 輩出되고, 지금까지의 醫師免許가 103,537名에 이른답니다. 韓日倂合 2年 前인 1908年6月 朝鮮 最初 西洋病院인 濟衆院 醫學校에서 醫師免許 1號부터 7號를 받은 7名(金弼淳. 朴瑞陽, 朱賢則, 김희영, 홍종은, 洪錫厚, 申昌熙)의 醫師들이 그들인데. 當時 朝鮮 初代 統監인 伊藤博文가 이들에게 直接 卒業狀을 授與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 모두가 獨立鬪士의 길을 걸었을까요? 歷史를 거슬러 올라가 1876年 外勢의 開港要求로 不平等 江華島 條約이 締結되고. 그 해에 釜山港이 開港되고, 4年 뒤인 1880年 元山港이 開港되었으며 이어 1883年 仁川港이 開港됩니다. 日本人들은 開港 港灣地域에 그들 自國民의 守護를 내세워 近代式 西洋病院을 새우게 되고 高宗은 危機意識 속에 1885年 美國人 宣敎師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의 奏請을 받아드려 贊成金 三仟원(當時 쌀 한 가마 參원)의 巨金을 下賜하여 朝鮮 王立病院(His Corean majesty’s hospital)널리 恩惠를 베푼다는 廣惠院을 새웠는데 12일 뒤 濟衆院(大衆을 救濟한다)으로 이름을 바꾸고 初代院長에 알렌이 就任합니다. 1895年 明成皇后가 弑害되고 高宗皇帝는 不安한 나날을 보냅니다. 따라서 宣敎師 알렌, 힐버드, 언더우드, 에비슨 들이 交代로 高宗을 지켜줍니다. 1907年 大韓帝國 軍隊 解散事件으로 第1聯隊 第1大隊長 朴昇煥 參領이 自決하게 되고 이에 激奮한 侍衛隊 將兵들은 武器를 들었습니다. 新銳武器로 武裝한 日本軍과의 交戰結果 日本軍은 中隊長 1名을 包含해 4名이 죽고 22名 負傷한 反面, 大韓帝國 軍隊는 將校 11名 等 68名이 死亡하고 100名이 負傷 當하는 그야말로 慘敗였습니다. 當時 大韓帝國 軍隊 負傷者들은 濟衆院에서 治療하였는데. 우리나라 땅 한복판에서 外國軍隊에 依해 죽어간 이들을 治療한 우리의 醫師 7人들은 어떤 衝激과 刺戟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1908年6月 醫師免許를 받은 7人 醫師 中 5名이 踪迹을 감추고 亡命길에 오릅니다. 朝鮮 첫 西洋式 病院 '濟衆院' 醫師된 朴瑞陽"내 몸에 흐르는 白丁 피 代身 科學의 피를 보라" 兩班들 病院 일 싫어해 濟衆院 入學 機會 잡아. SBS-TV 月火 드라마 '濟衆院'의 主人公 '黃丁(박용우)'은 白丁의 아들로 태어나 朝鮮 最初의 西洋式 病院 濟衆院의 醫師가 됩니다. 그 뒤 朝鮮 獨立을 爲해 滿洲로 건너가 獨立軍을 治療하는 軍醫의 삶을 澤합니다. 그런데 드라마 濟衆院의 主人公인 西洋 醫師 '黃丁'은 實際 人物일까? 그는 實存했던 白丁 出身 濟衆院醫學校(세브란스病院醫學校로 바뀜) 卒業者였으며 獨立軍에 投身해 軍醫가 된 朴瑞陽입니다. 드라마처럼 어릴 적 이름이 '적은 근수가 나가는 개'라는 뜻의 '소근개'는 아니지만 賤待받던 白丁의 아들이었습니다. 白丁은 妓生•갖바치•巫堂•광대 등과 함께 當時 身分이 가장 낮은 賤民 階級이었습니다. 白丁은 상투를 틀 수도 없고 갓을 쓸 수도 없었습니다. 結婚해도 가마를 탈 수 없고 돈이 있어도 집에 기와조차 얹지 못했습니다. 그는 1908年 세브란스病院醫學校를 1回로 卒業했습니다. 政府로부터 우리나라 最初 醫師 免許인 '醫術 開業 認許狀'을 받은 7名 中의 하나였습니다. 白丁의 아들이 醫學校에 入學할 만큼 當時 우리 社會가 開放的이었을까요? 세브란스 1回 卒業生 7名 가운데에는 쟁쟁한 人物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錦坡 洪錫厚는 作曲家 洪蘭坡의 兄이었고 金弼淳은 妹弟가 臨政要人인 金奎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中에는 官妓의 아들인 朱賢則도 있었습니다. 白丁 아들과 官妓 아들이 入學할 수 있었던 理由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兩班들이 病院의 지저분한 일을 할 수 없다고 入學을 忌避해 中人•平民들이나 基督敎인들이 入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朴瑞陽은 세브란스 校長 에비슨과 親分 있던 아버지 德分에 1900年 濟衆院醫學校에 入學했습니다. 허드렛일을 시켜 그의 됨됨이를 본 에비슨이 그를 入學시켰습니다. 그의 이름은 大韓每日申報(1907年 10月 23日)에도 나왔습니다. "難産의 苦痛을 겪고 있던 서울 合洞의 金婦人을 濟衆院 醫師 허스터氏와 醫學生 朴瑞陽 氏가 蘇生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卒業 後 母校에서 解剖學을 가르쳤습니다. 서울 勝洞敎會에서 만든 勝洞學校에서 學生들을 相對로 酸素와 水素를 利用한 公開 化學實驗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學生들이 그의 身分을 問題 삼아 賤視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내 속에 있는 五百年 묵은 白丁의 피를 보지 말고 科學의 피를 보고 배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韓日合邦이 된 뒤인 1917年 突然 滿洲로 떠나면서 그는 國內에선 잊혀졌습니다. 그는 延吉에서 救世病院을 세우고 崇信學校를 지었습니다. 韓國人을 爲한 診療와 敎育 活動을 했습니다. 滿洲 地域의 獨立武裝鬪爭團體인 大韓國民會 軍司令部의 軍醫로 任命돼 活動하기도 했습니다. 中國에서 獨立運動을 한 것은 그의 卒業 同期인 金弼淳이나 朱賢則, 申昌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滿洲로 떠난 뒤 그의 行跡은 단지 日帝가 남긴 軍 機密書類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잊혀졌던 朴瑞陽의 獨立運動 記錄은 박형우 延世大 醫大敎授가 發掘했습니다. 이 記錄으로 그는 숨진 지 68年이 지난 2008年에 政府로부터 '建國褒章'을 받았습니다. 그의 뒷얘기는 칠레로 移民 간 그의 孫子(74)가 2005年 歸國하면서 알려졌습니다. 朴瑞陽은 滿洲에서 돌아와 1940年 55歲로 京畿 高陽에서 숨졌다고 합니다. 3男3女를 두어 큰아들은 세브란스 醫大에 入學했으나 1年 만에 中退했습니다. 그의 同生 大陽은 세브란스 醫大를 나왔고 그의 女同生은 醫師와 結婚했습니다. 身分 差別 撤廢의 象徵인 朴瑞陽은 白丁 宣敎에 나섰던 勝洞敎會의 무어 宣敎師와 에비슨, 그리고 아버지 박승춘의 이름과 함께 우리 白丁 解放의 歷史로 남아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