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의 잊혀진 여인
<고종의 나들이>
조선왕조의 마지막 최후를 장식했던 대한 제국 고종 황제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또한 약육강식의 국제환경이 엄중하게 몰려온 19세기 말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등에 짊어질 기량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분의 무능한 여러 실수로 불행한 운명에 빠졌던 대한 제국의 신민들은 수는 많다. 그런데 국가적인 대사에 비하면 작은 불행이라면 작은 불행일수도 있는 운명이 이 고종황제의 무책임 [이 분 무능함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으로 한 양갓집 규수를 찾아갔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사주한 일본 불한당에게 습격당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뒤 겁을 먹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가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는 이미 노년의 세월에 들어섰음에도 ‘주변의 권고’로 새 황후를 얻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총애하던 엄비가 있었지만 장 희빈의 죽음 이래 상궁등의 궁녀들은 왕후가 될 수없다는 궁중 규칙에 의해 궐 밖에서 새 후보자를 찾아야 했다. 그는 왕의 결혼을 담당하게 될 가례도감을 설치하고 30여명의 양가집 규수들을 심사하는 세 번의 간택 과정을 거친 끝에 안동 김씨 가문의 한 소녀를 간택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그녀는 1871년생으로서 당시 17세였다. 간택이 끝났으므로 이 여성은 이미 황후라 해도 괜찮을 만큼 모든 것이 길일을 선택해서 혼례식을 올리는 일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음을 단단히 잡았고 이미 영왕 이 은 공을 낳은 엄비가 고종의 새 장가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이은 공을 부르는 명칭이 영친왕 의민태자등의 명칭들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영왕으로 부른다.]
<엄비>
엄비는 고종을 왕위에 올려준 주인공 조대비의 궁녀였었다. 그녀는 대원군이 장안의 파락호행세를 하며 안동 김씨의 눈을 속이고 로비의 수단을 총동원해서 공략했던 후계자 선정의 실력자였다. 결국 대원군의 아들 명복은 그 녀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빌어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명복은 어린 시절 조 대비를 뵈러 들락거리며 이 엄비와 눈이 맞았다. 고종은 엄비-를 평생 사랑했었다. 그녀는 명성황후에게 미움을 받아 궁에서 쫓겨나기도 했었지만 고종은 아관파천후 다시 옆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녀의 나이 40줄에 영왕 이은 공을 낳았다. [엄비는 1854년생이고 영왕은 1897년생이다.]
엄비는 궁중의 규칙 때문에 황후가 되지는 못했지만 고종은 그녀를 무척 총애했었다. 나이도 많고 인물도 별로였던 엄비가 고종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 불가사의하다는 후세의 수근거림이다. 우여곡절 끝에 간택까지 끝난 이 혼인계획은 없던 일로 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고종이 이 해프닝은 잊어버리기는 쉬운 문제다. 그러나 왕비 후보로 간택된 김 씨 녀의 인생에 준 영향은 엄청났다. 왕이나 왕자들의 배필로 간택이 되면 이미 그 사람의 정신적 배우자가 됨으로 절대 다른 남성에게 정혼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완고한 조선의 도덕율 때문에 김 씨녀는 간택녀라는 명예만을 지니고 20년간 수절해야 했다. 이런 비극적인 여인은 몇 십 년 뒤 다시 발생한다.
1907년 영왕의 배필로 간택되었다가 일제의 방해로 그가 파혼하고 1920년 일본인 니시모토 마사코 여사와 결혼하자 평생 결혼하지 않고 수절했던 민 갑완 규수다. 민 갑완 규수는 주 영국 공사관에도 근무했던 외교관 민 병돈의 딸로서 영왕의 약혼녀로 정혼했으나 일제가 틀어버리자 혼자 평생을 수절했다.
왕후의 삶을 살았어야 할 분이 사시기에 너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해야겠다. 간택될 때 하이틴이었던 김 씨 녀는 어이없는 굴레를 쓰고 이미 그 녀를 까맣게 잊고 있는 고종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20대가 넘어 30대의 후반기에 이르렀다. 꽃다운 여성미는 이미 시들기 시작한 연령이 되어 버렸다. 불혹의 나이 문턱에 선 그 녀가 오매불망하던 고종의 곁으로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친일도배 윤 덕영은 총독 하세가와의 사주로 순종의 도쿄 방문과 일왕 배알을 추진했었다. 먼저 고종을 움직여야 했다. 그것은 명실상부한 적의 군주에 대한 신하로서의 예의를 다 하는 것이었는데 비록 망했지만 한 때는 일왕과 같이 일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응할 리가 없었다.
교활한 윤 덕영은 고종을 압박하기 위해서 20년 전의 사건을 생각해내고 김 씨 녀를 궁궐로 데려와 고종 곁에 두기로 했다.
<덕예옹주>
이 완용이 합방전의 대표 친일 매국노라면 윤 덕영은 합방후의 대표 친일 매국노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는 이완용의 라이발로서 합방 뒤 고종이 이 완용을 멀리하자 그 틈을 파고들어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을 충실히 했었다. 그는 총독부에 적극 협조해서 큰 돈을 벌었었다. 김 씨 녀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라서 그 녀뿐만 아니라 집안의 팔자가 필지도 모르는 그런 청을 부모들도 거절할 리가 없었다. 고종은 그런 사건도 여인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펄쩍 뛰었지만 총독부와 윤 덕영은 막 무가내였다.
1917년 5월 말 경 길일을 택해 여인은 고종이 거주하는 덕수궁으로 들어왔다. 총독부는 그녀를 세월의 연륜을 지우는 짙은 화장을 하게 하고 새로 지은 황후의 예복을 입히고 황실의 문장인 배꽃 무늬가 빛나는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덕수궁 대한문으로 들어왔다. 강요에 의한 강제 부부 합방이었던 셈이다.
엄비는 1911년 장 티프스로 죽었지만 그래도 망국의 황제 옆에 이미 이 강 공이나 덕혜 옹주를 낳아준 매력 있는 후궁들이 서넛이나 되는 고종은 일제의 잊혀진 여인 강제로 안기기에 더욱 분노하고 여자와의 알현조차도 거절했다.
신랑이 신부를 거절했지만 덕수궁에서 다시 내쫓을 권한은 망국의 황제에게 없었다. 결국 이 여인은 정화당이라는 존칭만을 얻고 방 한 칸이 주어졌다 그리고 실로 용돈에 불과한 월 300원의 생활비가 주어졌다.
김 여인을 본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의 묘사에 의하면 주름이 진 창백한 얼굴이 세월의 연륜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미인이라는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인물은 그저 그렇고 그런 모양이었다. 비록 어두운 세월을 보냈지만 김씨는 성격이 도도했던 듯했다. 20년간 미완성의 황후의 꿈을 간직한 채 살아온 그 녀는 덕수궁에 들어와서도 황후로서의 위치를 주장하며 다른 상궁들과 거리를 두어 미움을 받았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입궁하고 2년이 되어 1919년 심야에 고종이 승하했다. 그녀는 비로소 내전에 들도록 허락을 받았다. 마음의 남편을 죽은 모습으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고종이 총애하던 상궁들을 포함해서 궁녀들은 그의 영전에서 모두 통곡을 했다.
일본인들은 고종의 죽음을 당분간 감추기 위해서 커튼을 내리고 궁녀들을 위협해서 울음을 그치도록 했다. 그러나 그 녀만 개의치 않고 해가 뜰 때까지 고종의 유해 앞에서 끝없이 서럽게 통곡을 하여 내막을 아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정화당은 고종 사후 다시 덕수궁을 나가 이왕직에서 마련해준 집에서 약간의 생활비를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정화당이 언제 그 한스러운 인생을 마감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1930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침묵을 남기고 슬프게 죽은 그 녀의 심경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보다 한 세대 뒤에 꼭 같은 비운의 간택을 받은 영왕 약혼녀 민 갑완 규수의 심경을 빌어 추측해본다.
민 규수는 상해등의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해방후 귀국, 여기저기 전전하다 부산에 정착해서 말년을 빈곤하게 지냈다.
1950년대 말에 언론의 주목을 받아 일반에 널리 알려졌고 1962년에 자신의 자서전인 ‘百年恨’을 출간했다. 그 때 그녀의 약혼자였었던 영왕은 일본에서 뇌혈전증으로 쓸어져 의식이 혼미한 실어증을 앓고 있었다. 왕조의 부활을 걱정한 이 승만 정부는 그의 귀국을 막고 있었고, 영왕은 전후 사기를 당해 귀국도 못하고 일본에서 고통을 겪어 왔었다.
영왕은 1963년 부인 마사코 여사와 함께 귀국해서 국적을 회복하고 병원에서 가료하다가 1970년 사망했다 할머니가 된 민 규수는 자서전 서두에서 이렇게 썼다. --간택이라는 인간의 계약으로 인하여 치르고 있는 공방(空房) 생활 50년의 역사는 가시밭길 바로 그것이었다. -- 갈기갈기 찢기고 찢긴 한평생, 슬픔과 외로움에 지쳐 눈물마저 말라붙은 생애, 나 자신이 돌아보아도 애처롭기 그지없으며 허무하기 짝이 없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내 머리에 백발이 성성하니 이젠 마지막 갈 길도멀지 않은 듯하다.
--청춘을 공허히 보내고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고 보니 오만가지 한이 가슴을 메워 말문이 벙어리처럼 꽉 막힌다. 그렇게 써내려간 슬픈 자전은 마지막에 아직도 귀국을 못하고 일본의 병원에서 의식을 잃고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영왕을 언급했다. 민규수는 그를 귀국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한국 정부를 나무랐다. 그리고 자신의 오직 희망은 투병생활을 하면서 내일을 기약 못하는 영왕이 제발 자기보다 더 오래 사시는 것이라는 기원의 말로 끝을 맺었다.
원망과 연민의 회한, 승하한 고종 곁에서 그토록 서럽게 울던 경화당 김씨도 인생을 문을 힘겹게 닫으면서 내려놓지 못했던 같은 회한이 아니었을까? 민 갑완 규수는 1968년 71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경화당 김씨보다 40년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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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인 이왕직 사무실에서 순종을 모시고 15년간 근무했던 곤도 시로스케가 쓰고 이 인숙 씨가 번역한 ‘대한제국 황실비사’를 기본으로 해서 만들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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