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족
사물 A는 아버지 흉내를 낸다.
분명 이 빠진 사기그릇인데
사물 A는 아버지인 척 헛기침을 하며
사물 B를 연주한다.
그러면 찌그러진 양재기인 사물 B는
내 어머니인 듯 사물 A에 맞춰
우는소리를 낸다.
새벽 기침처럼 울리는 곡조에 맞춰
돌연 사물 C가 된 내가
참회를 닮은 자조를 뱉으면
길어진 아침의 혈관으로 빗물이 스며든다.
낯선 계절에 갇힌 아침.
칙칙한 초록의 나라,
함석지붕으로 비가 불협화음을 뿌리고,
무채색의 여름 속으로 뛰어들어간
사물 C는 파랗게 질린다. /전기철
사물이란 말은 단순히 물건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한 물건을 만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무엇인가의 이름을 부르려면 골똘히 응시하거나 귀 기울이거나 해야 한다. 그래서 사물이란 말은 의미를 가진 물건이란 뜻이 된다.
여기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문득 아버지를 벗어놓은 아버지. 이 빠진 사기그릇 같은 아버지가 있다. 여기 어머니가 찌그러진 양재기처럼 놓여 있다. 어머니를 이탈한 어머니. 사기그릇과 양재기가 부부이니 사이가 좋을 것 같지 않다. 문득 그 부부의 자식인 '나'도 자조적 사물이 된다. 한 가족 세 식구의 불협화음, 여름날의 지루한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칙칙한 초록의 나라'인 여름은 열 덩어리인 도시인에겐 힘겨운 계절이다. 차라리 모든 감정을 벗어놓은 사물이 되고싶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