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墓碑銘)
1
숨 닳는 전쟁 속에
떨어져 묻힌 꽃잎
하늘을 돌아앉은
신화의 무덤 앞에
눈 멀어
지켜 선돌의
가슴에 쓴 모국어여!
2
침묵을 헤치고서
바람에다 부친 전언(傳言)
“조국의 품 안에서
젊은 혼은 졌노라”고
피 듣는
그 흐름 속으로
새겨지는 비명(碑銘)들….
3
발자국 잘못 찍힌
연대(年代)의 길목에서
오가는 세월에게
묻고 있는 그 이유는
응시한
벽의 의민가.
풀꽃들의 이야긴가 /이근배
'조국의 품 안에서 젊은 혼은 졌노라', 묘비명들 앞에 깊이 고개 숙이는 때다. 덧붙일 말조차 조심스러운 그 '연대'의 상황과 그 너머의 행간들이 더없이 쓰라리다. 1960년대 신춘문예 당선작, '조국'이 자주 등장하던 무렵의 뜨거운 '모국어'를 보여준다. 그렇듯 산화한 넋을 딛고 우리가 지금 여기서 웃고 울며 사는 것. 꽃다운 넋을 묻은 4월과 5월, 그리고 6월로 이어지는 '젊은 혼'의 비명을 안고 우리 산하는 오늘도 꽃을 피운다. 그 산하를 다시 가슴으로 받든다.
/정수자·시조시인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