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나무가 우레를 먹었다.
우레를 먹은 나무는
암자의 산신각 앞 바위 위에 외로 서 있다.
암자는 구름 위에 있다.
우레를 먹은 그 나무는 소나무다.
번개가 소나무를 휘감으며 내리쳤으나
나무는 부러지는 대신 번개를 삼켜버렸다.
칼자국이 지나간 검객의 얼굴처럼
비스듬히 소나무의 몸에 긴 흉터가 새겨졌다.
소나무는 흉터를 꽉 물고 있다.
흉터는 도망가지도 없어지지도 못한다.
흉터가 더 푸르다.
우레를 꿀꺽 삼켜 소화시켜버린 목울대가
툭 불거져나와 구불구불한
저 소나무는. /조용미
여행지에서 범상치 않은 나무를 만나곤 한다. 눈과 혀만을 위한 관광 말고 그래도 정신에 뭔가 새겨볼 만한 것을 만나려는 여정에서다. 어느 암자에 들렀다가 뜻밖에도 본전(本殿)이 아닌 주변 풍광 속 소나무에서 숭엄(崇嚴)을 만난다. 한눈에도 거목(巨木)이다. 우레를 먹은 것이 분명한. 살아가면서 문젯거리를 만날 때가 있다. 끙끙 앓다가 스트레스로 병을 얻는다. 하나 때로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삭아서 저절로 없어져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엉킨 실타래를 어떻게 풀겠는가. 불에 넣어버리면 그만이다. 아름다운 지혜다. 큰일을 만났을 때 삼켜 소화시켜버릴 만한 거인(巨人)을 떠올린다. 그 사람도 저 소나무처럼 흉터가 더 푸를 것이다. 새로 공개된 경교장(京橋莊)의 혈의(血衣)가 혹 그러한 흉터는 아닐는지. 우레를 삼킬 만한 기개를 기르련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