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생각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 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 버려 주고
깨끗해진 머릿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김기택(1957~ )
흰 밥이 내게 말하길 "밥벌레지?" 한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다말고 문득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한다. 또 다른 내가 말한다. "그래도 나는 사상을 가졌다. 나는 그따위 것에 연연할 소인이 아니다. 밥맛 좋다는 쌀이나 고르러 다니는 인간이 아니야…." 그러나 그런가? 사상은 밥에서 나오고 사랑도 밥에서 나오고 그래도 밥에서 나온다. 예의도 그렇다 들었다.
밥 앞에 위선자 아니기 쉽지 않다. 밥 앞에 부끄럽지 않은 자 흔하지 않으리라. '코 아래 짐승' 해결해 주는 것이 근본의 정치였고 정치며 정치일 것이다. 배부르면 생각, 눈 녹듯 사라진다. 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해와 달이, 바람과 산소가 다 공공의 것이듯 밥도 공공의 것이라면 어떻겠는가. 굶는 백성이 있다면 그건 나라도 아닌 것. 하하. 밥은 짓궂기도 하여라. 거지나 성자나 제왕이나 종이나 잡아당겼다 놓았다 한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 조선일보